설교

부활하는 산하 - 사무엘상 2:1~1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3-31 16:23
조회
318
2024년 3월 3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부활하는 산하
본문: 사무엘상 2:1~10



예수께서 죽음을 딛고 일어선 부활의 아침입니다. 죽임의 힘이 세상을 짖누르고 있지만, 결코 그 죽임의 힘에 의해 소멸될 수 없는 삶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찬미하는 아침입니다.

그 부활의 아침에 우리는 한나의 기도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대체 부활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찬가(누가 1:46~55)의 원형이 되는, 아주 오랜 송가입니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요 송가입니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염원이 아닌, 아주 오랜 민중의 염원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사무엘이 태어났을 때 그 어머니가 불렀던 노래로 전해지는 이 기도는, 예수님이 잉태되었을 때 그 어머니 마리아가 부른 노래와 그 내용에서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질긴 생명력을 가진 민중들의 염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무엘이 부여받았던 기대, 예수님이 부여받았던 기대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며, 그 기대가 끊임없는 민중들의 희망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사시대 말기 에브라임 지파에 속하는 엘가나라는 사람이 산간지방 라마다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사람이 한나요 또 한 사람이 브닌나였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여러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엘가나는 특별히 자식이 없는 한나를 챙겼습니다. 한나에게 엘가나는 정말 온 정성으로 대했습니다.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 그렇게 애틋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한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고대사회에서 여인에게 자식, 그것도 아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물론 아들로 이어지는 상속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런 주제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절실한 문제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나는 간절히 기도했고, 그 결과 기도의 응답을 받아 마침내 자신의 품 안에 사무엘을 안게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기쁨을 하나님 앞에서 노래합니다. 대개 소원이 이뤄지면 곧바로 성소에 가 하나님께 감사의 의식을 치르는데, 한나는 어린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집에서 함께 하다가 마침내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사무엘을 바치며 기뻐합니다.

먼저 이 노래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기쁨으로 주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삶을 가로막은 원수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원수들이란 꼭 인격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바라는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어떤 장애물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 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시다.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 한때 넉넉하게 살던 자들은 먹고 살려고 품을 팔지만,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는다.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2:3~8)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 이 내용을 잘 음미하기 바랍니다. 이 노래는 개인적인 감사의 기도라기보다는 너무나 원대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가지지 못한 여인으로서 한나의 처지를 반영하는 내용은 딱 한 구절뿐입니다. 그 밖의 모든 내용은, 항상 불가능한 상황에 맞닥뜨려 좌절해야 했던, 약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마침내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가 단지 개인의 노래가 아니라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노래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한 시대를 이끌게 될 인물의 탄생에 그와 같이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역사의 전환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 기도의 결말은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마침내 악인들 가운데서 승리를 거두리라는 것을 염원합니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분이 땅덩어리를 기초 위에 올려놓으셨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며, 악인들을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신다. 사람이 힘으로 이길 수가 없다. 주님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으로 그들을 치실 것이다. 주님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2:8~10)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갖고 있다면 여기서 의아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왕이 없던 시절이요, 더욱이 사무엘은 왕을 세우는 일을 극구 반대했던 인물인데, 주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의 승리를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여기서 왕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이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실현하는 왕을 말하는 것이지만, 아직 사무엘의 시대에는 그런 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무엘에게 기대되었던 희망이 왕이 존재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지속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무엘 당대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된 성서는 민중들 가운데 지속된 그 희망을 그렇게 기록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원사건에서 비롯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곧 이스라엘 민중의 염원은 끊임없이 역사를 관통하는 희망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200여 년 동안 왕이 없이 해방된 자유민으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끝자락에 사무엘이 태어납니다. 사무엘이 그 자유민 공동체의 마지막 지도자로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강력한 왕권체제를 바랐습니다. 성서는 애초 그 사실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배신행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극구 반대하지만, 마지못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써 민중의 주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왕권체제가 형성되고 난 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왕권체제가 형성되어 경제발전의 논리가 지배하고 정치권력이 강화되는 현상이 현저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백성 가운데 구현되어야 할 평등의 이상, 정의의 이상을 외쳤습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이념의 대치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희망의 표현이었습니다. 그것이 성서의 기저를 이뤘고, 그 희망이 더더욱 가혹한 죽음의 시대를 경유하고 난 다음 더욱 극적으로 표현된 것이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에게 이어진 성서의 중심 기저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봉착하는 불가능의 현실에서도 그 불가능의 장벽을 넘어서 누구나 진정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희망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을 마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사건의 의미를 새겨볼 수 있는 것도 본문 말씀이 지니는 그 깊은 뜻 때문입니다.

부활사건은 거대한 화산맥과 같이 분출하는 일련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역사의 변화를 뜻하며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변화를 뜻합니다. 억압의 시대에서 자유의 시대로, 불의의 시대에서 정의의 시대로, 갈등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 죽임의 시대에서 살림의 시대로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그 변화와 더불어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기쁨으로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 변화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우리는 너무나 깊이 절감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현상이 세계적으로 현저해진 상황 가운데서도 한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전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은 ‘독재화하는 국가’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대파 한 단이 어째 일파만파 파문을 일으키는 파급력을 지닐까요? 민생이 파탄 지경에 이르러도 그에 대해 파악도 못하고 파국을 자초한 정치권력의 파렴치함 때문입니다. 창당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정당이 돌풍을 일으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복수혈전 앙갚음 심정 때문이 아니라, 공정성 문제를 다루는 방식의 공정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증오와 적대의 논리는 죽임의 악순환을 만들어냅니다. 그 증오와 적대의 논리로 국민을 편 가르고, 나라와 나라를 갈라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는 정치세력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약자들도 더불어 안전하게 저마다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 개발과 약탈로 신음하는 자연이 되살아나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우리는 비로소 부활의 역사를 누리게 됩니다.

2천 년 전 한 분이 죽음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진실이 왜 중요합니까? 그것은 죽음과 같은 삶을 사는 모든 사람이 그 죽음을 딛고 일어나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의 선취요 표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의 아침, 그 진실을 새기며 우리 모두 진정한 부활사건의 증언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부활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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