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치명적인 유혹을 넘어 - 민수기 21:4~9[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2-25 15:49
조회
605
2024년 2월 25(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치명적인 유혹을 넘어
본문: 민수기 21:4~9



사순절 첫째 주일에 이어 오늘도 광야에서의 유혹이 본문 말씀의 주제입니다. 지난 주일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은 유혹 이야기인 반면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여정에서 겪은 유혹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의 유혹 이야기 원조격에 해당한다고 할까요?

말씀을 마주하면서 곧바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떠올렸습니다. 사람들은 자유가 억압당할 때 자유를 얻기 위해 갈망하지만, 거꾸로 자유가 주어졌을 때 오히려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을 통찰한 책입니다. 노예의 삶은 자유가 없이 주인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면 그만입니다. 반면에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삶에는 의지와 결단, 책임이 중요합니다.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것은 그 책임의 상황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말합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엇을 향한 자유’로 나아갈 때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성취된다고 보았습니다.

성서의 출애굽기와 이어지는 책들은,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갈망, 그러나 그 자유를 향한 여정의 고단함을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강력한 제국 이집트에서 노예로서 억압당하던 히브리인들이 자유인으로서 가나안 복지를 향해가는 여정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군대를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하여 광야에 이르자마자 히브리 백성들은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그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출애 16:3)
소위 이집트의 고기 가마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고기 가마가 있기는 하였을까요? 어쨌든 자유를 향한 여정에서 겪는 고단함이 빚어낸 퇴행적인 환상입니다.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민수기의 본문 말씀은 출애굽의 여정에서 반복되는 불평의 상황을 전합니다. 천신만고의 여정을 지나 이제 머잖아 가나안 복지에 이르게 되었을 즈음, 히브리 백성은 에돔 땅을 우회하여 광야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고 전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민수 21:5)
이 상황은 출애굽기가 전하는 불평 상황과 조금 다릅니다. 출애굽기가 전하는 바는 아예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서 그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민수기가 전하는 상황은, 먹고 마실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건 똑같은 것처럼 보이는데,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간 일용할 양식이 되었던 만나와 메추라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아예 없는 상황과 일용할 양식이 있기는 하되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의 차이는 큽니다. 아예 필요가 충족되지 않아 구하는 것과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는 조건에서 더 많은 것 또는 더 좋은 것을 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절대 빈곤의 상황에서 경제개발을 해야 하는 상황과 웬만큼 먹고 살 만해진 상황에서 경제성장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처방을 내립니다. 아예 먹고 마실 것이 없다고 불평했을 때는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먹을 것이 있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 불평에 대해서는 다른 처방을 내리십니다.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 벌을 내리십니다. 그 뱀에 물린 많은 사람이 죽음에 이릅니다.
이 대목에서부터 본문은 상당히 난해해집니다. 이처럼 고대 종교의 상징이 등장하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오늘 우리의 관념으로는 해석상의 곤란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순진하게 문자 그대로 믿어버린다거나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본문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불 본문의 진의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불뱀 또는 뱀의 상징적 의미를 헤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환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린 진노로 많은 백성이 죽음에 이르게 되자 백성들은 모세에게 와서 간청합니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민수 21:7)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사는 길을 일러주십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민수 21:8)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았습니다. 사람들은 뱀에 물렸을 때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오늘의 관념으로 볼 때 그저 주술적 행위에 지나지 않은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똑같은 주술적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는 우스꽝스러운 교훈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헤아려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뱀’ 또는 ‘불뱀’은 모순된 이중적인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불뱀’은 날개달린 뱀, 곧 ‘스랍’을 뜻하는 것으로 그냥 ‘뱀’과는 구별되기에 약간 혼선은 있지만, 그 혼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뱀은 우선 치명적인 유혹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삶을 삶답게 누리지 못하고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만드는 치명적인 유혹을 상징합니다. 아마도 직접적으로는 사막의 독사를 경험한 데서 이러한 연상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치명적인 유혹의 상징으로서 뱀은 창세기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뱀은 다시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구리로 만든 뱀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대목에서 그 뱀은 생명의 상징이 됩니다. 사실 이것이 더 일반적인 뱀의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뱀은 겨울잠에서 다시 깨어나는 재생(再生), 허물을 벗는 환생,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불사(不死)의 동물로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알과 새끼를 낳아 다산성(多産性)의 풍요와 가복(家福)의 신으로서 생명 탄생과 치유의 힘을 나타내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의신(醫神)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군의관의 상징, 유럽의 병원과 약국 표지에 뱀 한 마리가 둘둘 말려있는 것은 뱀이 생명의 창조와 치유의 힘과 관련된 상징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뱀을 바라봄으로써 죽음에 이르지 않고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고대 종교적 상징의 관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왜 이렇게 헷갈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고대 상징의 세계에 익숙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한 신으로 믿는 성서 기자의 시선에서 뱀의 상징을 나름대로 성서적 맥락에서 ‘토착화’시키고 있는 까닭에 다소 혼란스러워 보일 뿐입니다. 아마도 고대 사람들은 생명의 상징인 뱀을 바라보는 주술적 행위 자체가 효력을 지니는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성서의 기자는 그 관습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의미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의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뱀을 바라보는 행위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유혹의 위험성을 환기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들려진 구리 뱀 자체가 실체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뜻을 환기하는 매체로만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던 백성들이 치명적인 유혹의 위험성을 환기했을 때,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본문 말씀은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바라보는 것은 주술적 행위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치명적인 유혹의 실체를 바라보고 저마다의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마치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가 무슨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그것이 무슨 능력을 지닙니까? 그것은 세상의 폭력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세상의 수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특별히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허물을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있지만 십자가 자체가 어떤 능력을 발휘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한갓 미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요한복음이 환기하고 있는 말씀의 뜻입니다.
물론 구약성서 시대 사람들 가운데서는 여전히 뱀의 상징이 어떤 실체적 능력을 지닌 것처럼 착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그 뱀을 산산조각 내버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열하 18:4).

본문 말씀은 자유의 기나긴 여정에서 겪을 수 있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유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넘어서는 물질의 유혹, 과욕에 빠질 때 사람은 자유를 잃고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 풍요롭게 살고자 하는 것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사태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의 의미는 오늘 인간의 삶 가운데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부추깁니다.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더 많은 자원을 약탈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더 고도화된 기술을 개발합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더 큰 자유를 선사하고 더 풍요로운 삶을 보장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인류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절대 빈곤이 사라지고 인간의 수명도 놀랄 만큼 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 긍정적 성과에 도취해 기뻐할 수 없는 현실 가운데 있습니다. 생태적 순환의 한계를 넘어선 자원의 약탈은 심각한 자연의 훼손과 기후위기를 초래했습니다. 무한한 에너지원의 개발은 핵발전으로 이어져 한순간에 인류 전체가 파멸의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는 위험을 안게 되었습니다. 제어되지 않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공지능의 탄생으로 인간이 기계에 예속되는 사태에 이를 수 있는 위험 상황마저 우려됩니다. 그로 인한 수혜는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집중되고 절대다수의 사람은 죽음의 구렁텅이에 내몰리는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습니다. 치명적인 유혹에 빠진 결과입니다. 살겠다고 하는 것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사태입니다.

성서의 말씀은, 그 치명적인 유혹의 실체를 제대로 응시함으로써 그로부터 벗어나도록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 위험을 헤아려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부단히 진정한 삶의 지혜를 일깨우고 외치는 몫을 감당할 때 그 희망은 허망한 것으로 그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깊이 새기는 것은, 교회가 그 몫을 맡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다시금 일깨웁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젊은이들의 졸업과 입학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는 가운데 교회가 진정한 삶의 희망을 스스로 구현하고 퍼뜨리는 역할을 맡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삶을 파멸로 몰아넣는 치명적인 유혹의 실체를 직시함으로써 거꾸로 진정한 삶의 희망을 바라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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