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찬가 - 빌립보 2:1~11[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3-24 16:56
조회
408
2024년 3월 2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찬가
본문: 빌립보 2:1~11



오늘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내일부터 부활주일 직전까지 이어지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절정기에 해당합니다. 흔히 삶의 절정기라고 하면 가장 화려한 어떤 시점을 일컫지만, 그런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장 잘 응축하여 보여주는 시기에 해당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 까닭을 보여 주고 있는 마지막 삶의 절정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찬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학자요 동시에 목회자였던 사도 바울의 서신은 한결같이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열정에서 비롯됩니다. 빌립보서 역시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합니다. 예컨대 아주 심한 말로 유대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대목도 있습니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서는 전반적으로, 진정으로 위로를 받는 삶이 무엇인지, 기쁨을 누리는 삶이 무엇인지 금방 느낄 수 있는 어조로 일관합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갈라디아서 같은 책이 마치 ‘날선 검’과 같은 책이라면 빌립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따뜻한 ‘위로의 손길’과도 같은 책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켜내기 위한 예리한 신학자로서 면모를 갖고 있음과 동시에 교회 구성원들의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목회자로서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는데, 빌립보서는 그 목회자로서 바울의 진면목을 잘 읽어낼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빌립보서가 그러한 성격을 띤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은 로마의 세계 안에서 합법적이고 용인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 밖의 변두리 존재들(outsider)과 연대하는 삶을 지향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신실한 신앙을 지켜나가는 공동체를 향하여 편지를 쓰고 있으니 만큼 그 마음이 절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의 유럽 선교의 첫 열매였습니다(사도 16). 그러니 더욱 마음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최초의 이방지역 교회로서 빌립보교회에서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선교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각별하게 뒷받침을 해준 빌립보교회이기에 아무래도 그 교우들에게 전하는 서신의 내용이 더욱 각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서두에서부터 말미에 이르기까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일관합니다.

바울은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지금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제자 디도를 통해 절절한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일관되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빌립보서 내용 가운데서 본문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교회 안에 나타난 어떤 문제의 상황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권면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본문 말씀은 먼저 다소간 분쟁과 불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 빌립보교회의 소식을 듣고 바로 그 문제부터 지적하며, 진정으로 하나 될 것을 권면하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첫머리를 좀 더 실감나게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2:1)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 사랑의 위로, 영의 교제, 자비와 동정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은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지향점을 일깨워 주고 있으며, 사랑의 위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과 상통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친밀성을 함축합니다. 영의 교제, 그리고 자비와 동정은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입니다.
이 물음으로 사도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물음의 요체들은 새삼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빌립보교회 교우들이 이미 체현하고 있는 덕목들일 것입니다. 마치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심정으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새삼 환기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힘을 얻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로를 받는지,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고 있는지, 그리고 서로 자비를 베풀며 동정을 아끼지 않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질책이라기보다는 격려에 해당한다는 것은 계속 이어지는 밝은 권면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어지는 권면(2:2)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고, 한마음이 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같은 생각’은 바울이 올바른 인간관계를 말하고자 할 때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로서(1:7; 로마 12:3,16; 15:5), 이어지는 말들은 같은 의미를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의의를 지닙니다.
계속 이어지는 권면(2:3 이하)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경쟁심(저열한 마음, 시기심)이나 허영(자기과시, 자랑)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겸손을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리스적 가치관을 전도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바울만의 고유한 가치전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치전도는 겸손에 대한 그리스 세계와 유대교적 세계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적 세계에서 겸손은 저열한 마음, 노예근성, 비굴함의 의미로 통용된 반면 유대교의 세계에서는 선한 공동체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유대교 세계에서는 겸손은 진리, 사랑의 결속과 함께 중요한 덕목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겸손의 덕목을 그리스도의 본질과 결부시켜 더더욱 격상시킵니다. 또한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남의 일도 돌보라는 권면은 사도 바울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고전 13:5)을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이상과 같은 구체적인 권면은 여전히 질책이라기보다는 격려에 가깝지만, 빌립보 공동체 안에 있는 모종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어떤 경쟁심 같은 것이 있었을 수 있고(4:2 참조), 전반적인 격려의 논조 가운데서도 그에 대해 분명히 경계하는 권면을 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통상 지도자와 회중 사이에서 관계가 원만할 때 권면은 특별할 게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저 지당한 말씀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일반적인 교훈이나 권면의 성격을 벗어나 모종의 사태를 적시하는 권면이 필요합니다. 꼬집어 말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권면은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권면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태도, 특별히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의 수평적인 유대와 일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 유대와 일치를 지향하는 삶의 태도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본문 말씀을 대하면서 스스로 돌아보며 그 권면이 주는 의미를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격려 어린 권면은 ‘그리스도의 찬가’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찬가’는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 널리 받아들여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어떤 근거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2:6~7).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 내놓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마음을 품으라는 이야기는 윤리적 권면 이상의 의미를 함축합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든지, 겸손하라든지 하는 식으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행할 수 있는 윤리적 덕목으로 구체화해서 이해하는 것이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이 말씀은 그 이상의 근본적인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완전히 가치를 전환하라는 이야기이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삶, 하나님과 일치되는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 2:20). 바로 그와 같이 거듭난 삶의 경지를 말합니다.
바울은 바로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 경지에 이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2:9 이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와 같이 사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에, 이제 거꾸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찬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철저하게 자기를 비울 때 거꾸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는 이 불의한 세계에서 사랑이 겪지 않을 수 없는 끔찍한 고난의 증거”(김상봉)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이뤄진 대반전입니다.
이 대목에서 죽었던 나는 되살아납니다. 그러나 되살아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삶을 누리는 ‘나’입니다. 모든 것을 버렸지만 모든 것을 얻는 나입니다. 결국 나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버렸지만, 이제 거꾸로 나의 모든 것을 인정받고 나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경지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자기부정과 고통만을 동반한다고 보는 것은 일면의 진실일 뿐입니다. 신앙의 궁극적 경지는 나 자신과 삶에 대한 진정한 긍정과 기쁨입니다. 부정과 긍정의 역설적인 통합의 경지, 그것이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닮는 경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께서는 백성의 해방을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로 세상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고, 사람들이 진정으로 따라야 할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은, 그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궁지로 몰아넣고 생명을 빼앗는 악순환을 거부하는 길입니다. 그 길로 모든 사람이 영광을 누리고,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부활을 믿는 것은 그 길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일매일 일상사의 걱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이 그 길을 따르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서신의 말미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4:11~13).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뭘까요? 사람은 궁핍함을 겪거나 고통을 겪을 때 한없이 가라앉습니다. 거꾸로 부유함을 누리거나 잘 나갈 때면 한없이 기고만장해집니다. 작은 차를 타고 달리면 자기 몸도 작아진 느낌이 들고 큰 차를 타고 달리면 자기 몸도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큰 차나 작은 차나 길거리에서 모두 달리는 차로서 똑같은 한몫을 하고 있을 뿐이고, 또한 동시에 모두 다 내 몸을 옮겨 주는 교통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바울은 어떤 경우에나 모두 그에 맞게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지금 당장 주어진 조건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해나가는 상대적인 조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진실을 깨닫습니다. 지금 자기를 자기 되게 하는 것은 지금 처해 있는 조건이 아니라, 자기 삶의 중심에 두고 있는 궁극적인 가치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바로 그것임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것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근거이며, 그것이 바로 어떠한 경우에나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는 근거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두고두고 새겨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주 함축적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갖는 의미를 새기고 더불어 부활의 영광을 예비하는 한 주간,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의 지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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