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있는 그대로 - 누가복음 10:25~28[김귀성 교우 / 유튜브]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4-03-10 16:13
조회
526
2024년 3월 1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청년주일 공동예배
제목: 있는 그대로
본문: 누가복음 10:25~28
김귀성 교우



여러분 반갑습니다. 한달 전쯤 청년주일 말씀 나누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먼저 말씀 나누기를 하게 된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첫째로 7년 정도 다녔으니 나눠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구. 둘째로 한 청년의 강한 입김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도주관 예배가 더욱 활성화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한 달이라는 꽤 긴 시간이 주어졌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는 안되겠다 싶을 때 원고 작성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어떤 얘기를 할까 고민은 좀 했었습니다. 준비를 하면서 힘들었던 건 생각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이 도막난 얘깃거리 중 어떤 얘기를 할까 선택하는 게 고민이었습니다. 오늘은 할 얘기는 감동을 느낀 성경 말씀의 뜻을 밝히고, 현 정부를 작심 비판하는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ㅎ 제 과거 얘기를 좀 하고요, 제가 느낀 살림교회 얘기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1.
저는 전남 신안군 임자도라는 섬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임자도는 아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섬입니다. 바다를 보려면 차를 타고 10분 정도는 가야 하지요. 그곳에서 19년 동안 살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정서는 ‘부대낌’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이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 될 수 있는 그런 곳,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내게 싫은 행동을 해도 금세 풀어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인이구요, 제가 살던 마을 근처 대기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자주 갔습니다. 제 어머니는 교회를 정말 열심히 다니셨습니다. 주일, 수요, 금요일 구역예배, 새벽기도까지.. 그래서 유년시절 그 영향을 받았었고, 새벽기도도 가끔씩 따라갔었습니다. 제 어머니를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련해집니다. 지금은 세상에 안계시거든요. 제 어머니는 강원도 삼척 두메산골이 고향이셨는데, 섬사람인 아버지와 결혼해서 노동을 참 많이하셨습니다. 저도 학교 다녀오면 거들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육체적으로 고단했겠지만 늘 긍정적이셨습니다. 어머니는 산에 가는 걸 참 좋아하셨습니다. 봄이 되면 같이 고사리랑 두릅을 따러 다니고, 논두렁에 세발나물, 뻘가에 있는 함초를 따러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참 아름다운 추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6학년 즈음 어머니가 암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7개월 간 항암 치료를 하시다가 제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한달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얘기는 처음 암선고를 받았을 때, 이미 온몸에 암이 퍼져 삶이 한달 정도 남았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7개월이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 신에 대한 원망, 일찍 떠나버린 엄마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섬이다 보니 공간적 제약이 있어서 도망치진 못했습니다. (나의 성격), 밤이 되면 어두 컴컴해지고, 10시쯤 되면 배가 끊기니까요. 그래서 저는 교회로 도망쳤습니다. 제 고향교회 대기리교회에는 학생회 활동이 있었습니다. 매주 토요일이 되면 학생 20여 명 정도 모여서 예배드리고, 얘기 나누고, 같이 노는 활동이었습니다. 저는 학생회 활동에 매주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나중에는 찬양 인도도 맡아서 해보기도 하고, 학생회 회장역할을 맡아 일도 하는 등 열심히 참여했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주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나 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2남 1녀였던 우리 집에 새엄마와 새 형이 생겨 3남 1녀가 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벌써 12년이 지났으니 우스갯소리처럼 할 수 있지만, 그때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새엄마에게 엄마라고 부르기까지 7년이 걸렸습니다. 처음엔 이모라고 불렀었는데, 그 뒤엔 호칭을 빼고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인연이 된 게 이 생 속에서 사랑하라는 뜻 아닐까 알아차리며, 살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학생회 생활을 재미나게 열심히 했습니다. 고향교회 목사님 내외께선 성결 교단 소속이었지만, 진보적인 성향이셨고 그 덕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방학이 되면 예수살기 모임에서 주관하는 사회적 이슈와 함께하는 수련회에 참여하고, 두분께서 진행하시는 내적 치유 프로그램. 무전여행, 3대 종단 체험, 등 이러한 경험들이 제 결핍을 채워주고, 아픔을 치유해줬습니다. 그리고 제 삶의 자양분이 되었고, 지금까지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 생활을 위해 천안으로 올라왔습니다.

2.
천안에서 살기 전엔 도시 생활을 동경하는 시골 촌놈이었습니다. 처음엔 시내버스타는 게 그렇게 헷갈리더라구요. 막상 살아보니 저는 농촌 생활이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생활 초반엔 낯선 환경에 기가 많이 죽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낯섦’, 섬에서처럼 자연스레 친구 관계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선택해야 한다는 점, 누군가 짜준 공부가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공부를 해야한다는 점 그리고 ‘열등의식’, 취업이 목표인 특성화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실패해서 대학에 진학했고, 지방에 있는 대학을 다니며, 변변찮은 고향, 사회에서 경시하는 농사꾼의 자녀이다는 점. 제 속 깊은 곳에서 남과 비교하며 발현되는 열등의식이 저를 냉소와 자기연민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학년 때는 적응을 못했었습니다. 좀 겉도는 느낌이랄까요? 저는 주로 도서관에 자주 갔었습니다. 그때 제일 좋아했던 소설이 태백산맥이었구, 전태일 평전, 리영희 선생님 책 등 자꾸 그런 책들에 손이 갔었습니다. 그러면서 사회적 이슈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습관적으로 했던 신앙생활에 싫증을 느끼며,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천안살림교회 인문교양강좌를 소개받았고, 한두 번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이정희 목사님께서 사랑의 사중주라는 주제로 강좌를 진행하셨었습니다. 과제로 아가서 10번 읽어오기가 있었는데, 한 장 읽고 갔습니다. 그때는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곁가지로, 민중신학, 역사적예수, 페미니즘 얘기도 하셨었는데, 이런 얘기를 더 듣고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곤 1년간 다녔던 감리교회를 떠나 살림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교회에 갔을 때 청년회 분들이 향후 청년회 활동 방향성을 논의하는 등 다소 건설적인 회의를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마음속으로 “아 정말 잘왔구나!” 생각했습니다. 무언가 기성 교회와 달랐고, 무엇보다 전교인 행사 때 시원한 음료(녹색,갈색)를 마실 수 있는 게 놀라웠고, 재미났습니다. 병천에서 기숙사 생활 할 때 목사님 사모님이 저녁도 사주시고(전어) 그랬었는데 참 감사했구요. 여하튼 지금도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천안살림교회를 다니면서 좋았던 점을 세 가지 정도로 추려봤습니다.

첫째는 혐오와 차별을 배제하는 문화입니다. 사회생활 하면 서로 관계가 형성되기도 전에 받는 불편한 질문들이 있습니다.(ex : 부모님 뭐하시니, 어디 사니, 전세, 월세) 살림에선 그런 질문들이 일절 없었다는 점입니다. 나이, 학벌, 지역, 성적지향 등으로 혐오하고, 차별하지 않으며, 세심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살림의 문화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드러내더라도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서로를 존재 그 자체로 아끼시는 교우님들을 보며, 채워질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민주적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처음 교회 왔을 때 매월 진행되는 공동의회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1년에 한번 진행 되는 예결산이 매월 진행된다는 점, 그리고 그 내역이 투명하게 공개 된다는 점. 예전에는 헌금을 드릴 때 막연하게 하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물론 그것도 있지만 지금은 공동체를 아끼는 마음으로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물질은 쓰여지겠지만 그 내역을 알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그 덕에 헌금에 대한 마음가짐도 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매월 의회를 위해 뒤에서 몫을 감당하시는 분들을 보며 민주적 절차가 성립되기 위해선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개인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의회 또는 모임 중에 교우님들이 의견을 나누시는 모습을 보며 “아 이렇게 의견을 개진하고, 추진해가는 구나”, “이렇게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는 구나!”하며 공동체를 가꿔나가는 모습들을 배웠습니다. 특히 교회 옆 토지 개발건은 제가 처음 교회를 나왔던 18년도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일로 알고 있습니다. 이슈가 생길 때마다 의견을 물으시고 진행하시는 목사님을 보며.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함께 일을 진행하시는 걸 보며 대단하시다고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부하는 공동체입니다. 인문교양강좌, 청년들 독서모임,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저에게 공부해야 할 이유를 줍니다. 물음이 생기게 합니다. 살림에서 공부하면서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신앙적 단어의(부활, 구원, 심판, 죄, 율법) 뜻을 다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죄’라는 말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역사적 예수, 민중신학 이야기가 저에게 종교적 자유를 선사했고, 다양한 종교를 수용할 수 있도록 품을 키워주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요가 수련을 꾸준히 하게 되었는데요. 그러면서 불교와 힌두교를 이전보다 깊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종교들이 함께 움직일 때 시너지 효과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의 사상은 안으로 모이고, 서양의 사상은 밖으로 퍼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각 종교마다 발생된 문화권이 다르기 때문에 한 가지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불교와 힌두교는 내면에 집중하기 때문에 문제를 보는 자신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하고, 개신교는 사회 구조적 측면 변화에 집중합니다. 저는 뜻을 따르는 개인에게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타 종교와 관계를 ‘서로 다른 배를 타고 한 곳을 향해 간다’는 그 표현이 참 와닿았습니다. 저는 그 배가 조각배로 떠올랐고, 서로 밧줄로 묶어 함께 항해하면 큰 풍랑이 와도 버티며, 정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3.
마지막으로 본문말씀을 고른 이유를 밝히며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어떤 학생이 한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웃사랑과 자기 사랑 이 둘 중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목사님이 답하시길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으니 자기 사랑이 먼저다”. 라고요. 이 질문은 제가 고등학교 때 세례 받기 전 세례자 교육 때 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늘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이 삶 속에서 예수님처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지독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용광로 같은 마음이 넘쳐 흘러서, 지금 우리 마음까지 녹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기 사랑의 방법 중 하나로 저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연습을 합니다. 김귀성은 지금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1)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고 2) 쉽게 분별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3) “그럴 수 있지”라고 마음 먹습니다. 그러다 보면 과거의 후회, 자책이 훌 털어지고, 나 자신을 수용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 힘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 사랑을 느꼈습니다. 진실로 감사합니다. 저도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하겠습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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