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 창세기 22:1~13[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3-17 13:54
조회
461
2024년 3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본문: 창세기 22:1~13



아주 익숙하지만 보기에 따라 난감한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대번에 그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의 의도와 심정이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 떠 오르지만 이 이야기는 일체 그런 묘사 없이 담담하게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 이야기에 대한 제법 확고한 해석이 이미 자리하고 있기는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순종,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아들 이삭의 순종에 관한 이야기로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과연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본문 말씀의 뜻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본문 말씀을 따라가며 다시 환기해 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거기서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아이가 없어 그렇게 애를 태우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까스로 얻은 아들인데, 이제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니 얼토당토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런 군소리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착착 준비합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킵니다. 번제에 쓸 장작도 쪼개어 싣고 길을 떠납니다.
길 떠난 지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 이릅니다. 성서 역대기하(3:1) 딱 한 구절이 그 산 위에 성전을 세웠다고 증언하고 있어서 전통적으로 모리아 산은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는 산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 산 위에는 이슬람의 알아크사 사원이 있고,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것으로 여겨진 바로 그 자리에는 장엄한 황금 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슬림, 곧 이슬람교도들은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바치려 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곳은, 훗날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했다 내려온 곳이 메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산이었다는 전승에서 말하는 바로 그 산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까닭에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중요한 성지가 되어 있습니다. ‘알아크사’라는 말 자체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뜻입니다.
브엘세바에서 그곳에 이르기까지는 나귀로 사흘거리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산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종들에게 기다리라 말하고 아들과 함께 산에 오릅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아무 말이 없던 이삭이 말문을 엽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만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담담하게 말합니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나 달리 준비된 것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습니다. 정말 묘하게도 이삭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은 채 제물로 올려집니다. 그렇게 제물로 올려진 아들을 향해 아브라함이 칼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외쳤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예, 여기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알았다.”
아들을 내리치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니 수풀에 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다가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그곳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으로 ‘여호와이레’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완전한 믿음의 소유자 아브라함이 그 믿음을 입증받은 사건으로 기억합니다.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식마저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완전한 믿음, 철저한 순종의 표본으로서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더불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반항하지 않고 순종한 이삭의 믿음을 전하는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다시 말해 너무나 당연한 순종과 헌신에 관한 이야기로만 기억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기억할 때마다 바로 그 태도가 따라야 할 믿음의 정도인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중대한 두 가지 진실을 간과합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 가지의 중대한 진실입니다. 하나는 이 이야기 주인공들이 처한 딱한 처지요, 또 다른 하나는 그 처지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기존의 통념을 벗어버리고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입니까?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자식을 바치라니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목숨을 바치라니요! 성서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의 심경을 전혀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펼쳐지는 이야기는 묘사되지 않은 그들의 심경을 충분히 예측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바쳐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요?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아들은 또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정말 그렇게 잔인한 하나님을 믿어야 할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그 앞에서 전율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이야기는 그 두려운 의문을 해소해 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그 무모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중단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종교사적 전환이요, 문명사적 전환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성서의 종교가 다른 모든 고대의 종교들과 구별되는 분기점을 보여주는 중대 사건입니다. 인신제사, 곧 인간을 희생제물로 삼는 제의가 중단되는 중대 사건입니다.
이 인신제사의 전통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후대 왕조시대(므나쎄 왕)까지도 지속되었습니다(열하 23:10). 힌놈의 골짜기에서 몰록에게 사람을 바쳤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사람을 제물로 받는 ‘몰록’과 왕을 뜻하는 ‘멜렉’은 같은 어원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까 성서는 인간 희생제물을 필요로 하는 몰록과 역시 인간 희생자들을 필요로 하는 권력이 같은 속성을 지닌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성서는 이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그 희생제물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외치는 하나님은 무고한 희생제물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대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진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순전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로만 기억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째서 멀쩡한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아브라함의 양심적 거리낌이나, 까닭 없이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기에 처한 이삭의 처지를 안중에 두지 않는 해석만이 통용되고 있을까요? 어째서 그 무모한 일을 중단시킨 하나님은 강조하지 않고 시험하는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해석이 마치 정설인 듯이 통용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의식과 생활양식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할 때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갈등을 무마하는 방법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인간 사회의 고질병입니다. 그것은 아주 노골적인 방식에서 아주 은폐되고 세련된 방식에 이르기까지, 겉으로 드러난 양식은 다르지만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변함없습니다. 노골적인 방식은 누군가 무고한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처벌하거나 추방하는 방식입니다. 은폐되고 세련된 방식은 어느 한 편에 유리한 반면 어느 한 편에는 명백히 불리한 사회적 관계를 당연하게 여기며 그 관계를 고수하는 방식입니다. 오늘날 흔히 경험하는 사회적 현실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그와 같이 희생을 강요하는 논리, 그리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은 흔히 신의 뜻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신의 뜻으로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이 지니는 폭력성이 은폐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세계 안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대목, 곧 그가 도대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태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신의 뜻이라 하여 순종하는 태도는 사실 그러한 고대적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일대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 대신에 양으로 대체되어 여전히 고대적 믿음의 흔적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사건은 폭군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희생자의 처지를 헤아리는 자애로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되는 일대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믿음보다 더 큰 하나님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예상했던 경로로만 다가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에게 다가옵니다. 마땅히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그 희생을 저지하는 방법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을 대할 때 새삼스럽게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그 점을 눈여겨 보지 않습니다. 아들을 바쳐야 하는 끔찍한 일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희생양이 허용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 제약된 현실에서 상상력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희생양 제의는 고대 사회에 도처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제물로 바치는 형식으로, 또는 유대인들처럼 죄를 뒤집어씌어 먼 곳으로 내보내는 방식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 안의 죄가 정화된다고 믿었습니다. 일종의 주술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나 무고한 희생제물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볼 때, 하나의 제의로서 지속된 ‘희생양’ 제의의 의미는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털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죄의식 또는 허물을 환기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떨치지 못한 인간의 허물을 환기하고 진정으로 새로워지고자 하는 결단의 의식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일 뿐입니다. 그 제의 자체로 인간 사회가 의롭게 된다고 믿는 것을 거부한 견해는 이미 구약성서에 등장합니다. 예언자들이 일관되게 ‘제사보다는 정의’를 외친 것이 그 진실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주술적 믿음은 오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대속론’의 오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더 이상 죄가 없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인간에게는 더 이상의 어떤 노력도 불필요하고 그저 천진난만하게 그 믿음만 지키면 된다는 것을 뜻할까요?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누군가에게 죄를 전가함으로써 자신은 의롭게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일깨웁니다.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두고 사람들이 흥분하여 돌을 내치려고 할 때 예수께서는 외칩니다.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희생양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솟구치는 순간 예수께서는 그 폭력의 충동을 저지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께서는 끝내 그 충동의 희생제물이 되고 맙니다. 무고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합니다. 이때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누군가 무고한 사람을 희생함으로써 스스로 깨끗해질 수 있다는 믿음의 세계가 그 사건으로써 끝났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은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6:6).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놓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인간 삶의 방식을 끝내야 한다는 염원을 확인하며 다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의미를 받아들일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주술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삶으로서의 믿음이 됩니다.

누군가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그 희생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막아낼 수 있는 희생에 대해서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는 더더욱 고약합니다. 그런 사회는 평범한 일상의 삶 자체가 불안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런 사태를 두고 신의 뜻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최악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익숙하게 경험하고 있는 풍경입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다급한 외침으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을 믿기를 바랍니다.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으로 끊임없이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삶이 실은 죽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움으로, 부활의 삶, 거듭남의 삶을 바라보게 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진정한 삶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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