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 요한복음 14:18~24[이성철 전도사/유튜브]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4-04-22 18:26
조회
155
2024년 4월 2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4:18~24
이성철 전도사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는 고별사입니다. 이야기는 해방절 전날, 그러니까 다른 복음서들이 마지막 만찬의 날로 설정한 바로 그날, 식사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때의 세족은 기존의 예식 분위기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세족식의 원형을 벗어나, '나처럼 여러분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시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세족식과 예식을 반복하는 행위가 아니라, 발을 씻어주는 원래의 의미를 간직하라는 뜻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주신 정례적인 예식을 뛰어넘는 행동의 의미, 그것은 바로 제자들에게 전해주신 '새계명'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13장 34~35절

예수의 삶을 따라오고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다른말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평범하고 익숙한 말이 왜 '새'계명이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사랑을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이 새계명의 의미를 받아들이기 위해 요한 공동체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할것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지 65년 정도가 지난 시기, 즉 요한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요한공동체가 직면한 상황들을 살펴보아야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했던 제자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의 요한공동체의 제자들을 함께 지칭합니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박해라는 현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와 헤어지게된 슬픔과 고통만이 아니라, 예수가 떠난 뒤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증오 대상'이 되어, 박해당하고 추방당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것은 이들 요한공동체가 유대교의 정체성을 혼란하게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로인해 회당으로부터 이질적인 대상으로 낙인찍히고 폭력적인 배제를 당했던 경험이 반영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출교된 요한의 유대인 예수를 따르는 이전까지는 스스로 그 일부라고 여겼던 전통적인 유대적 배경으로부터 떠나서 자신들을 새롭게 정의하는 여정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들 예수를 따르는자들은 유대교로부터 평생을 배워온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이 일은 요한공동체의 몇몇 유대인들에게는 견디기가 어려운 일이었고, 다시 회당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은 현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16장 2절

이 구절은 추방당한 이들에게 가해를 한 이들이 회당 관계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의 예배공동체의 예배와 합의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배제의 장치가 작동하였으며, 이 폭력은 외부에 강력한 폭군이 행한 것이 아닌 내부의 이들도 연루되고 공모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회당의 증오 대상이 된 동시에 세상의 증오 대상이 된 것이고, 회당에서 폭력을 당해야 했던 것처럼 세상으로부터도 온갖 폭력의 대상이 되었으며, 회당에서 모든 재산과 자격을 박탈당했던 것처럼 세상으로부터도 그러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다시금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가지 문단으로 나뉘어집니다. 앞부분은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는 부분이며, 뒷부분은 유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본인이 없는 시기를 보내는동안 도움이 펼요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더불어서 유다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왜 우리에게는 나타나시고 세상에는 나타나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예수님이 나타나면 훨씬 쉬운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째서 예수님의 사랑이 세상에 확대되지 않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계명일 뿐 아니라, 제자들 안에 있는 자신의 현존의 표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려는 의지와 능력 안에서 그사랑은 하나로 이루어집니다. 다만 그 사랑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볼수 있지만, 세상은 예수를 보지 못합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과 예수님의 현존은 그 사랑안에 있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 예수처럼 사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에 전해질 수 있음을 전하고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현실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때로 현실에 좌절합니다. 그 길을 가는것은 쉽지 않습니다.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것은 많은 순간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쉽게 좌절하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너무나 빠르게 퇴행하는 세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희망이라는 말을 내뱉기가 부끄럽고, 세상과 자신을 나아지게 애쓰는 모든 노력과 운동들이 무력해져 큰 파도 앞에 홀로 서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의지가 박약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또한 요한 공동체처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서로를 증오하고 박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무기력할 때, 스스로 하는일이 작게만 느껴질 때 위로가 되었던 짦은 이야기가 있어서 전해드리려 합니다.

미국의 평화운동가 애먼 헤내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헤내시는 스물네 살 때 제1차 세계 대전 징병을 거부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사회 공동체가 전쟁으로 폭주할 때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평화 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런 그를 설명하는 짧은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혼자서 손팻말을 들고서 "전쟁 반대"를 외치는 그를 향해 많은 사람이 비웃으며 조롱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전쟁을 막고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겠느냐고.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나를 바꾸는 일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너무 큰 고통과 좌절감 앞에서 우리는 쉽게 무력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때로 더 큰 무력감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그리고 약속합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믿고 지켜왔으며 그 약속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6절에서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이라는 속성을 가진자로 규정됩니다. 질서에 반하는 존재입니다. 규범을 위반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 보냄 받은 존재'입니다. 질서 밖에서 자유로이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세상 속으로 개입해 들어오는 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예수가 부활하는 자리, 우리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될 자리, 보냄받은 세상입니다. 억척같은 우리 삶 한가운데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될 자리입니다. 부활의 자리를 지키는것은

홀로 전쟁반대를 외치는 피켓은 비록 작고 초라해보일지라도 거대하게 덮쳐오는 파도 앞에서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겠다는 선언이었던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예수의 사랑을 지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하는 세상에 피켓하나를 손에든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피켓에 어떤것들이 쓰여있으신가요? 너무 많은것들을 감당하고 있거나 피켓에 쓸 공간 부족하지는 않으신가요?

지난주로 세월호 참사 10년이었습니다.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참사는 7년이고, 이태원 참사는 벌써 2년입니다.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는 21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는 29년, 씨랜드 화재참사는 25년 입니다. 이들의 가족은 여전히 피켓을 들고있습니다. 매일 피켓을 들고 세상에 맞서서 싸우고 있습니다. 10년이 지나도, 15년이 지나도, 29년이 되어도 모두가 여전히 똑같이 말하는 것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나라와 유가족들이 바라는 정의로운 세계는 결코 떨어져있지 않고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듣고 품어야할 이름과 아픔들이 줄지 않고 늘어만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오겠다는 약속을 성취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며 오늘의 부활을 살아내야할 당사자입니다. 요한의 공동체는 이미 회당과 공동체에서 배척과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마지막 구절은 우리를 끊임없이 재촉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분부하신일, 해야할 일을 끝까지 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겠다. 일어나라, 여기에서 떠나자라고 재촉합니다.

이렇게 되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계명의 의미가 더 다가옵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가는 상황속에서 세상에 반대한다는 그 분명한 삶의 태도 방향을 갖는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부활의 증인으로살아가는 길입니다. 그것의 동력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살림교회 여러분, 예수께서 주신 약속으로 힘입어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어려운 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내는 지금의 자리가 바로 세상의 최전선이며 부활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이곳이 아니라 여러분이 살아내는 부활의 증인의 장소에서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더 나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며 오늘의 부활을 살아내야할 당사자입니다. 우리는 슬픔의 증인이며 또한 사랑의 증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길 바랍니다. 그 사랑안에서 우리의 눈이 밝아져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하는 가운데 진정한 부활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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