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해방의 여정, 그 전환 - 베드로전서 1:13~21[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3-03 17:42
조회
535
2024년 3월 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해방의 여정, 그 전환
본문: 베드로전서 1:13~21



베드로전서는 박해서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정한 박해의 국면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 환영받지 못하는 로마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고 있는 서신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지배적인 사회질서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공동체의 질서와 가치관이 긴장하고 있는 정황 가운데서 기록된 서신입니다.
서신의 수신인은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들입니다(1:1). ‘나그네’(파라코이)는 로마의 시민권자는 아니지만 전적으로 떠돌이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체류중인 나그네들’ 또는 ‘거류민’을 나타냅니다. 완전히 사회에 통합된 사람들도 아니고 전적으로 배제된 사람들도 아닌 일종의 경계인이라고 할까요? 이들은 그 불안정한 지위 때문에 늘 의심을 받아야 했습니다. 한편 이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확실한 귀속감을 갖고 있는 이들은 미심쩍은 종교를 갖고 있다는 낙인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수신인들의 그 성격 때문에 베드로전서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당대의 지배적 사회질서를 넘어서는 급진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긴장 가운데서 의미심장한 신앙의 유산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 역시 그 수신인이 나그네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2:17).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는 그 의미가 현실 사회 안에서 법적 지위를 뜻한다기보다는 종말론적 믿음 안에서 땅 위에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 맥락에서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구체적 덕목을 제시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근본 도리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고 있으십시오”(1:13).
여기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라는 표현은 다른 번역본(개역)을 볼 것 같으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고 직역되어 있습니다.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나그네의 행장을 말합니다. 먼 길 떠나는 사람이 옷이 흩날리지 않도록 허리띠를 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정신을 차려서’는 ‘근신하여’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길 떠나는 사람의 정신적 자세를 말합니다. 허리띠를 동여매는 자세에 상응하는 정신적 태도를 말합니다. 어떤 분명한 목적지를 향하여 길 떠나는 나그네의 자세입니다.
결국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나그네는, 처음에는 실제 어중이떠중이로서 나그네를 함축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떤 뚜렷한 목적을 향하여 길을 떠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그네가 됩니다. 처음 나그네의 의미는 곤고한 삶의 실상을 말했다면 그다음 나그네의 의미는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능동적 삶의 지향을 함축합니다. 말하자면 하잘것없는 존재가 능동적인 주체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나그네로서의 삶 자체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에 놀라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은 전에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러분은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1:14~19).
이 대목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전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이 그 요체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던 때에 가졌던 욕망을 따라 사는 삶에서 거룩한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재차 강조됩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지의 시대 욕망을 따르는 삶의 방식,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삶의 방식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거룩하게 사는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무지의 시대의 삶의 방식,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삶의 방식은 당대 이방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한 단면을 말합니다. 운명의 굴레에 매여 주술적 행위를 반복하는 삶, 그 안에서 안위를 보장받고 싶어 하는 욕망을 따르는 삶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노동하는 모습은 어떤 문화 어떤 세계에서나 다르지 않지만, 그 현실에서 어떤 희망을 기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고대 이방종교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중요한 한 가지는 축제일을 꼽고 그 축제일에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적절히 지키는 것이 저마다 삶의 안위를 보장해 준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귀신이 많은 세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 세계는 주어진 현실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고 따라서 좀처럼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고차원의 윤리도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그 점에서 확연히 구별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추상적인 언명이 아닙니다. 그 주술적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하다’고 하면 곧바로 종교적이고 신성한 어떤 것을 연상하지만, 구약성서의 맥락, 그리고 본문 말씀의 맥락을 통해 볼 때, 그 의미는 거룩한 하나님을 닮는 삶을 말합니다. 일상과 구별된 어떤 삶이 아니라 일상에서 구현되는 거룩한 삶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 삶을 살았을까요? 한마디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고, 이웃을 돌보고, 심지어는 주인없는 시신을 거두어 주는 등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그 삶을 구현하였습니다. 주술에 의존해 구원을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일상 가운데서 펼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새번역은 ‘해방’이라고 번역한 것을, 개역이나 그 개정판은 ‘구속’ ‘대속’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로부터 하나의 교리적 관념이 굳어졌습니다. 본래 개념 자체로 보면 ‘구속’ ‘속량’이 맞습니다. 그것은 전쟁포로나 노예를 돈을 주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을 뜻합니다.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는 것도 금전을 통한 속량의 의미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었다’는 말이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사실상 주술적 믿음을 정당화하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만으로 그냥 받아들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지만,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깨우치고 그에 걸맞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 교리적 명제는 공허한 주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확고하게 믿는다 한들 삶의 변화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공허할 뿐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를 지니려면, 단지 사랑을 실천했을 뿐인 무고한 분이 가장 극악한 폭력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도 내가 거기에 동참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러기에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믿고, 무고한 희생을 강요하는 삶의 질서에 저항하고 진정한 삶을 추구하고 그 삶을 살아갈 때야 비로소 그 말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본문 말씀은 그 믿음을 따르는 삶이 가능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를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미리 아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1:20~21).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더 이상 죽음에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죽음과 같은 삶에 매이지 않고 진정한 해방을 만끽하는 삶을 누리는 희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러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거룩한 삶입니다.
어느 한 지점에, 어느 한 시점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의 삶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헛된 생활을 뒤로 물리고 진정으로 거룩한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 삶은 종교적 차원에 한정되는 삶이거나 내면세계에 한정된 삶이 아닙니다. 그 삶은 우리의 역사적 차원에서, 현실적 삶의 차원에서 마땅히 이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2:12).

지난 주간 3.1절 10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3.1정신이 무엇입니까? 독립과 자주의 의지를 만방에 표방하면서 평화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숭고한 정신의 발로였습니다. 그 사건은 우리 역사의 중대한 분기점으로서 민주공화국의 원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전체 인구 가운데서는 낮은 비율이었지만 참여 비율은 월등히 높았습니다. 복음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기며,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오늘 많은 교회가 ‘건국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 빠지고 있습니까? 세상 안에서 구현해야 할 새로운 시대의 전망을 상실한 탓입니다. 잔인한 독재와 냉전의 시대, 갈등의 시대로 퇴행하는 일에 교회가 동참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 그 믿음을 지키는 삶은 확연히 구별되는 삶의 방식을 요청합니다. 이전과 이후가 다르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과 삶에서 우리는 한없이 겸손해야 하지만, 그 믿음과 삶을 지키는 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분명한 자각을 지녀야 합니다. 그 자각 가운데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애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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