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을 넘어서는 믿음의 자유 - 사도행전 16:25~34
2004년 2월 1(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장벽을 넘어서는 믿음의 자유
본문: 사도행전 16:25-34

지난 화요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월례강좌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그 성숙함을 위한 진단과 제언"을 주제로 하였는데, 세 개로 나누어진 발제 가운데서 첫 번째 발제로 "참 '교회됨'의 신학적 이해"를 제가 맡았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꾸준히 영향력을 확대해 왔지만 거꾸로 오늘 공신력이 급격히 실추된 한국교회의 위기 문제를, 공식적인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진솔하게 진단하고 대안을 찾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그 동안 변방 외곽에서만 한국교회의 개혁을 외쳐왔던 저에게는, 그 중심에서 발언을 하는 기회였습니다. 세 사람의 발제 내용은 한국교회 위기의 각기 다른 측면을 지적하는 것이었지만, 오늘 현실의 교회가 교회의 궁극적인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너무 멀어졌다는 점을 지적한 데서 공통적이었습니다.
발제가 다 끝났을 때 잠시 동안의 짧은 침묵을 깨고 터진 첫 번째 질문은 매우 단도직입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까?" 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충분히 예측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보자면 절망스럽지만, 우리는 희망하기에 지금 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진실하게 헌신하는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또한 있지 않느냐'는 것이 함께 나눈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한국정치 현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지금 불법 대선자금과 관련하여 정치인들이 줄줄이 구속되어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분리수거'가 되지 않는 오염된 정치현실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증이 절대 근거 없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는 사태입니다. 그 와중에 다소 이레적으로 한 정치인이 국민 앞에 깊이 반성하는 뜻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재정 전 의원의 성명입니다. 정치인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현실정치 한복판에서 중책을 맡았기에 정치인으로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성공회 사제로서 대학의 총장을 지내기도 했던 분인데, 한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실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정치인으로서 역할을 마감할 즈음 구속이 되었습니다.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고백으로 말문을 연 이 전 의원은, "상대적으로 작은 허물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항변해 보았지만, "이미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은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았"기에, "개인적으로 다소 억울하고 서운한 점도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록 그 작은 허물마저도 단죄하라는 국민의 요구를 수렴한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현실정치에서 느꼈던 희망과 좌절감을 피력했습니다. "콘크리트 같은 기존 정치질서와 권위에 도전도 해 보았고, 때로는 저 스스로 정한 원칙에서 물러서 타협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정치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그 절망감을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기존 질서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지만 바로 저 자신이 그 기존의 질서에 갇혀 좌초했습니다. 결코 상황만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 역시 그 상황에 안주하고 타협했습니다. 많이 부족했습니다. 어쩌면 역부족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저의 부덕의 소치입니다. 깊이 반성합니다." 그러나 물론, 국민의 힘으로 정치를 개혁해줄 것을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제가 조금 아는 분이라 변호하기 위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의 고백이, 현실정치의 벽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음과 동시에 그 벽의 실체가 드러난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변화의 과정이요 희망의 조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함께 생각해본 것입니다.

너무나 큰 이야기들만 했나요? 이제 우리들 자신 또는 구체적인 한 인간의 경우를 생각해볼까요? "세 살 버릇 여든 살까지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성품이나 습성이 좀처럼 바뀌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속담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생각해보면 금방 실감합니다. 어린 시절의 성품과 현재의 성품이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생각해보면 대개가 그다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에게 절망하기도 합니다. 정말 나에게서 어떤 것은 버리고 싶은데, 죽어도 안 고쳐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남들은 잘도 하건만 나는 죽어도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만든 장벽인지, 또는 선천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장벽인지, 아니면 그 어떤 해결되지 않은 삶의 조건 때문에 생긴 장벽인지 몰라도 헤어나지 못하는 장벽을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미덕이 되면 다행이지만, 스스로에게도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너무나도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언제나 마음은 청춘이지요? 그리고 자신은 항상 청년 시절의 그 모습 그대로일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길거리에 나서면 여지없이 '아저씨' '아줌마'로 불리거나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로 불립니다. 그 때 스스로 깜짝 놀랍니다. 저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청춘 그대로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만, 명함판 사진을 줄줄이 놓고 보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 이 경우는 외모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정말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심하게도 변해갑니다. 사람의 마음이나 성품이라고 해서 다를까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변했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마음이나 성품은 의지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만 변했다면 절망할 수밖에 없겠지만, 내가 마음먹은 대로 변해가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울 이야기의 한 토막을 함께 읽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이방인 간수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게 된 사건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이야기할 때, 항상 그의 사상과 삶의  변화에 주목합니다. 유대인 율법주의자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유인으로서 바울에 주목합니다. 바울은 그 점에서 당연히 귀감이 되는 인물이고, 우리가 그렇게 주목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울이 그와 같이 사상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된 밑바탕의 근원적인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의미심장하게 전해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진정한 자유인의 대열에 이끌 수 있는 마음 바탕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에 관한 이야기치고는 조금 이례적입니다. 사도 바울에 관한 이야기에서 기적 이야기는 결코 흔치 않은데, 이 이야기는 초자연적인 기적 사건을 전합니다. 이야기의 초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한 때(19세기) 서구 신학자들은 또 논란을 벌였습니다. 빌립보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것이 사실이냐를 문제삼았고, 오늘 본문을 사도행전에서 해석하기 가장 곤란한 본문 가운데 하나로 보았습니다. 제가 누누히 강조하지만, 그 기적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 이야기가 전하는 진실이 무엇이냐, 그 이야기의 초점이 무엇이냐를 문제삼으면 기적 사건의 사실 여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방인에게 전도를 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전도를 한 까닭에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때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터전이 흔들리고 문들이 열렸으며 죄수들의 수갑과 차꼬가 풀렸습니다. 잠에서 깨어 갑작스런 그 사태를 알아차린 간수들은 틀림없이 죄수들이 다 탈옥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결하려 합니다. 문책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순간 바울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는 그대로 있소" 당신들이 문책을 당해야 할 일이 없으니 절망하지 말라는 외침이었습니다. 그 극적인 사태를 경험하고 이방인이었던 간수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도 풀려나고 간수들의 집에서 대접을 받습니다.
이 극적인 기적 사건의 진실은 바울과 실라의 자유함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감옥의 장벽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감옥의 장벽 안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들은 스스로의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대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기도하고 찬송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장벽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장벽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애초부터 장벽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물리적인 장벽이 무너지고 자신들에게 채워진 수갑과 차꼬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탈옥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증언해줍니다. 이미 없는 장벽이기에 그 장벽을 넘어서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다를 바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마음은, 그들의 믿음은 그 어떤 조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감옥의 장벽은 사도의 일행을 불온하게 여기는 당국이 그어놓은 선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이 본문 이야기에서 진실로 위대한 사건은, 지진으로 감옥문이 열렸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감옥문이 열려 있든지 닫혀 있든지 상관없이 자유함을 누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기적 이야기의 진실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처음부터 그들에게 감옥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 어떤 장애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그들이었습니다. 극적인 기적의 사건은 그 사실을 극적으로 전하는 효과를 지닌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의 변화, 우리의 현실의 변화는 그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물론 이 시간, 저는 '이것저것 조건 따질 것 없다, 믿으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식의 맹목적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과 조건을 탓하기에 앞서 마음의 중심부터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그 어떤 변화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한결같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켰기에 바울은 진정으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의 현실,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 정치의 현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 확인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절망하지 않고 희망의 새 세계, 희망의 새 인간을 이루는 근원적 힘은 끝까지 진실을 지키려는 그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 위대한 믿음을 지키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