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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제4강] 일용할 양식을 베푸시는 하나님 - 필요를 충족시키는 삶의 권리
 최형묵    | 분류 :   | 2017·05·31 22:20 | HIT : 279 |
https://www.facebook.com/hyungmook.choi/videos/1981493502081510/
살림 인문교양강좌 2017년도 상반기 강의
주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권리 - 국민주권 시대에 다시 읽는 성서
강사: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제4강(5/31) 일용할 양식을 베푸시는 하나님  - 필요를 충족시키는 삶의 권리


1-1. 인간사회는 오랫동안 필요(needs)의 충족을 위한 경제생활을 영위해왔다. 그와 같은 경제생활이 영위되는 동안 필요의 충족을 넘어 무한한 욕구(wants)의 충족을 위해 부를 축적하거나 돈을 모으는 것은 악덕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 경향은 모든 문명권에서 공통된 것이었다. 특히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필요를 넘어선 부의 축적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해왔다.
1-2. 그러나 오늘날 인간사회의 경제생활에서 욕구와 필요의 경계는 모호해졌으며, 끊임없는 욕구의 충족을 위한 경제성장이 오히려 권장되고 있다. 오늘날 욕구의 충족을 위한 부의 축적은 더 이상 악덕으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권장해야 할 덕목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와 같은 가치의 전도는 자본주의의 형성과 함께 이뤄졌다.

2. 성서는 ‘하나님의 정의’(제3강 주제)를 밑바탕으로 하여 경제생활의 중요한 규범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부와 가난을 상관관계로 보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한 몫을 보장하는 것을 정의의 실현으로 보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한 몫은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몫으로, 성서는 어떤 경우이든 그것이 필수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만나 이야기(출애 16:1~36), 주의 기도(마태 6:9~13, 누가 11:2~4),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1~16), 최후심판의 비유(마태 25:31~46) 등은 그 모티프를 전해 주는 중요한 전거들에 해당한다.
2-1. 이집트에서 탈출한 출애굽 공동체에 만나는 ‘일용할 양식’으로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려졌으며 그것은 축적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부존자원이 제한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부의 축적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누구나 필요에 따라 ‘일용할 양식’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2-2-1. 만나의 모티프는 주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다시 등장한다. “뜻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에 이어지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청원은 하늘의 정의에 상응하는 땅의 정의의 출발점을 함축한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바른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데서 누구나 공평하게 누리는 일용할 양식은 모든 문제에 앞서는 가장 선결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주의 기도는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하늘의 정의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원은 인간이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조건들로부터 그 누구든 결핍된다면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2-2-2. 여기서 ‘일용할 양식’은, 루터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현금, 순수하고 선한 배우자, 순박한 아이들, 착한 고용인, 순수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치자, 선한 정부, 좋은 날씨, 평화, 건강, 교육, 명예, 좋은 친구, 신용 있는 이웃 등”을 포함한다. 그것은 인간이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말한다.
2-3.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각기 다른 시간 동안 일을 한 노동자들에게 하루 생계비에 해당하는 동일한 임금을 부여한 포도원 주인의 원칙이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는 것으로 선포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정의는 노동의 업적과 무관하게 삶의 필요를 따라 재화를 나눠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비유는 업적에 따른 분배정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노동의 기회 또는 노동의 시간과 상관없이 누구나 기본적인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정의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2-4. 최후심판의 비유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선포함으로써 절실한 필요의 요구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곧 정의라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절실한 필요의 요구에 직면한 사람들은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 곧 사회적 약자들 또는 배제된 이들로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성서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이 곧 정의를 이루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고 있다.
2-5. 이와 같은 성서의 관점은 업적의 논리를 일체 배격하는 바울의 인의론(認義論)을 통해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 동시에 땅에서 구현해야 할 인간의 정의는 그 어떤 업적을 전제조건으로 하지 않고 누구나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기본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을 일차적인 요건으로 한다. 성서의 전망을 따른 정의의 필수적인 요건은 업적에 무관하게 누구나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보장받을 만큼 사회적 재화를 분배받는 것을 일차적으로 포함한다.

3-1. 초기 교회와 교부들 또한 축적된 재물의 불의함을 경고하고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나눔을 강조하였고, 그 정신을 실천하는 데 힘을 쏟았다. 4세기의 교부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부와 가난의 인과관계를 분명히 인식하는 가운데 부의 근원은 어떤 불의에 기초한 것이며 따라서 누군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공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죄악이라고 하였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재물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배타적 축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하여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토지와 자연 만물에 대한 공유를 역설하였을 뿐 아니라 부자들의 재산상속마저도 금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축적된 재물에 집착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탄식과 사회적 정의의 요구를 외면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보다 재물에 의지하려는 불신앙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3-2. 중세기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필요를 넘어선 욕구로서 탐욕의 죄악성을 주목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을 받아들인 아퀴나스는 욕구(wants)를 필요(needs)에 묶어두기를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공감하였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욕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필요의 한계를 넘어선 탐욕을 죄악으로 간주한 것이다. 또한 아퀴나스는 소유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도 하였기에 종종 그 견해가 오늘날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오용되기도 하지만, 아퀴나스의 소유권 개념은 사용권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어 재산에 대한 소유자의 배타적 권리를 옹호하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소유권과는 명확히 구별된다. 아퀴나스는 재물에 대한 소유가 인간의 권한 밖에 있고 인간은 단지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소유란 일정한 인간사회의 질서 안에서 필요의 충족을 위한 사용을 효과적으로 이루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또한 대부에 따른 이자를 취하는 것 또한 위법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것은 사람을 죄에 빠트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3-3. 이상과 같은 성서 및 그리스도교 전통에서의 가르침은 자본주의 이전의 필요 충족의 경제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중세말기의 상업의 발달 등 경제의 변화와 더불어 무력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목적에 종속되는 경제적 질서, 다시 말해 인간이 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경제관은 지금까지도 가톨릭의 경제관의 목표로서 남아 있다.

4-1.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했다는 막스 베버의 명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명제를 접할 때 우리는 종교개혁으로 등장한 프로테스탄티즘이 곧바로 오늘날 경험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정당화할 만한 경제관의 변경을 동반한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개혁에 의해 경제가 인간의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이상 자체가 폐기된 결과는 아니었다. 종교개혁의 시대에도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해치는 경제적 행위를 금하는 목소리는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이 사회의 새로운 변화와 경제생활의 변화 가운데서 이루어진 만큼 새로운 현상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대두하였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경제관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4-2. 마르틴 루터는 성서를 번역하는 가운데 처음으로 Beruf(직업ㆍ소명)라는 독일어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영어 단어 Calling(직업ㆍ소명)에 상응하는 그 의미는 새로운 종교적 표상을 함축하게 되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와 대결하는 가운데 수도원 생활을 세속적 의무를 회피하는 이기적인 냉혹함의 산물이라고 하는 한편 그와 대조적으로 세속적인 직업노동은 이웃사랑의 외적 표현으로 간주하였다. 루터는 세속적 의무 이행은 모든 상황에서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또한 허용된 모든 직업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직업 개념이 베버가 말한 의미에서 자본주의 정신과 친화성을 가졌는지는 의문시된다.
4-3-1. 막스 베버가 주목한 바에 따르면,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은 프로테스탄티즘 가운데서도 특히 칼뱅주의 윤리와의 결합 속에서 이뤄졌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 윤리가 자본의 축적을 위한 투자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베버의 통찰의 요체이다.
4-3-2.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과연 칼뱅주의가 의도한 결과였던가 하는 것이다.  칼뱅주의가 경제생활에 대해 윤리적으로 규율하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칼뱅주의는 상업 및 산업이 발전하고 있는 조건 안에서 바로 그 조건들에 적용할 수 있는 가르침을 의도하였다. 칼뱅주의는 경제적 동기가 작동하는 삶의 모든 영역을 영적인 삶과 어긋나는 것으로 보지 않았고, 자본가를 이웃의 불행을 이용해 부자가 된 사람으로 불신하지 않았으며,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경제적 삶의 전반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뱅주의 안에서 문제가 된 것은 부의 축적이 아니라 방종과 과시를 위한 부의 남용이었다. 칼뱅주의의 가르침이 추구한 이상은 근면한 노동으로 자신의 성품을 단련하고, 하나님이 용납하는 직무에 전념할 줄 아는 사람들이 균형 잡힌 진지함으로 부를 추구하는 사회였다. 그 가르침은, 과거의 교회가 이윤추구를 종교적 삶에 어긋나는 것으로 책망하면서도 그렇게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뇌물을 받은 이율배반을 범했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은 경제적 생활 자체를 하나의 종교적 행위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려는 목적을 지녔다. 그것은 교회에 복종하며 개별적 선행이나 종교적 의례를 통해 세속적 삶을 속죄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과거 세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도록 각자의 성품을 단련하고 더불어 사회를 재조직화하려는 것이었다.
4-3-3. 그러나 애초 칼뱅주의가 의도했던 것과 달리 자본주의 경제는 제 갈 길을 가고 말았다. 애초 금욕주의 윤리적 이상과는 달리 전사회적으로 허용된 투자행위는 자신의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고, 자본의 이윤추구가 그 자체의 고유한 목적이 되고 말았다. 윤리적 기초를 부정해버린 자본주의의 발전의 결과이다.  
4-4. 결국 오랫동안 허용되지 않았던 부는 종교개혁을 통해 부의 선용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허용되었던 것인데, 종교적 뿌리를 거두어치우면서 이내 부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마침내 종교 자체로 승격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런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자본주의는 “부의 원천이 빈곤의 원천이 되는, 귀신이 곡할”(마르크스) 사회이다.

5. 오늘의 그리스도교 윤리는, 필요 이상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자본주의 경제가 인간의 삶에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경제생활을 인간의 전반적인 삶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방편으로 그 위치를 재조정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 과제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필요와 욕구를 구분하였던 과거의 지혜를 다시 생각하는 과제를 포함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생활에서의 정의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과제를 포함한다(경제민주화, 기본소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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