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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제5강]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 - 성서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노동과 휴식
 최형묵    | 분류 :   | 2017·06·07 21:26 | HIT : 287 |
https://www.facebook.com/hyungmook.choi/videos/1985669338330593/
살림 인문교양강좌 2017년도 상반기 강의
주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권리 - 국민주권 시대에 다시 읽는 성서
강사: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제5강(6/7)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  - 성서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노동과 휴식


1-1.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개발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채찍질하고 자신의 정신을 황폐화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 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노동을 할 때에는 탈아감을 느낀다.”(카를 마르크스 <경제학 철학 수고>).
1-2. 지금까지 모든 사회형태에 있어서 인간은 “사냥꾼이거나 어부이거나 양치기, 또는 비판을 직업으로 하는 비판가였다. 또 인간은 생계수단을 잃지 않기 위해서도 그 중의 하나, 곧 사냥꾼이면 사냥꾼, 비판가이면 전문적인 비판가이어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특수한 배타적 활동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두가 각자 자기가 원하기만 한다면 어느 분야에서도 소양을 쌓을 수 있다. 보편적인 생산은 사회가 통제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은 이 일을 또 내일은 저 일을 할 수 있으며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고 저녁에는 양떼를 몰고 저녁식사 후에는 비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결코 직업적인 사냥꾼, 어부 양치기 또는 비판가가 되지 않고서도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 모두를 다 행할 수 있는 것이다”(카를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1-3. 마르크스의 노동 현실에 대한 진단은 지나치게 비관적이며, 또 역으로 노동소외에서 벗어난 전인적 인간의 실현에 대한 전망은 지나치게 허황된 것일까? 성서는 과연 인간의 노동에 대해 어떤 통찰을 담고 있을까?

2-1. 노동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우선 창조 이야기를 그 전거로 삼을 수 있다.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유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이 동반자적 관계임을 보여 준다. 성서 자체에서 이를 분명하게 재해석하고 있는 출애굽기 20장 8절이하에 나오는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께서 쉬셨으니 너희들도 쉬라고 함으로써 창조 이야기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이 일하셨으니 너희도 일하라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쉬셨으니 너희도 쉬라는 이야기이다.
2-2. 이 유비의 관계는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에 분명하게 제시된다. 이 본문의 기자는 땅에 아직 식물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해명한다. “야훼 하나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다”(2:5).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는 것’과 인간이 ‘땅을 경작하는 것’은 상호 조응하는 관계다. 그리고 이 관계로 말미암아 세상의 만물이 생성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동반자적 협력관계에 있다. 이 협력관계를 매개시키는 것이 ‘노동’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자신을 펼치시며 인간은 그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 결합된 이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만물을 생성시키고 그 생성된 것들의 생명까지도 온전히 보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2-3. 창세기 3장이 전하는 노동의 고통은 노동조건이 악화되었음을 말하는 것이지 노동 그 자체가 저주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주받은 것은 땅이지 노동 자체가 아니다. 그 땅이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낸다는 것은 노동조건이 악화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 조건에서도 하나님과의 동반자적 관계를 형성하는 노동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 성서는 하나님에 의해 긍정된 노동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규정들을 제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강제노동의 상태에서 해방된 출애굽 사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구약성서의 여러 법전들(계약법전: 출애 20:22~23:33; 신명기법전: 신명 12~26장; 성결법전: 레위 17~26장)에서는 노동과 휴식의 엄격한 규정과 함께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규정들을 두었다. 강제노역과 과중한 조세의 부담으로부터의 해방, 노임의 정시 지급, 노동소득을 강탈하여 자유인을 노예화할 수 있는 이자의 금지 등은 자신의 몸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3-2. 십계명(출애 20:1~17; 신명 5:1~21) 가운데 안식일 규정과 부모공경 규정은 노동의 문제와 직결된다.
3-2-1. 흔히 안식일 계명은 제의 또는 예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 일차적 의미는 규칙적인 휴식(휴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은 일정한 경제적 수입의 포기를 의미한다. 당장의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휴식하라는 계명의 의미는 고대 사회의 농경방법(휴경을 통한 지력의 회복)과 상관이 있겠지만, 동시에 매우 강력한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그것은 자유농민이 거느린 식솔들을 쉬게 하라는 것이다. 더 많이 갖고자 하는 탐욕을 억제하는 일은 개인 수양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는 문제이다(노동시간의 단축으로 더 많은 일자리 보장).
3-2-2. 부모공경 계명의 의미는 노동의 능력과 기회가 보장된 사람이 노동의 기회와 능력을 상실한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는 사회적 연대의 원리를 집약한 것이다. ‘약속이 딸려 있는 첫 계명’ 곧 ‘그래야 너희가 이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는 부언은 그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연대의 원리가 무너질 때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자유는 붕괴된다.
3-3. 계약법전은 강제노동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민에게 주어진 약속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 성격은 이후 모든 법전과 예언자들의 선포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노동과 직접 관련된 규정을 보면, 계약법전 가운데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출애 23:10~13), 신명기법전 가운데 십일조(신명 14:22~29; 26:12~15), 추수할 때 남겨두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몫(신명 24:19~21 / 23:25~26), 고리대금과 담보의 엄격한 제한(신명15:7~11; 24:10~11; 24:6; 24:12~13; 17;15:1~3), 노동자의 권리 보호(신명 24:14~15), 성결법전 가운데 노동자의 권리(레위 19:13~),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해가면서까지 이익을 보려는 행위 금지(16), 안식년(25:1~7), 희년법(25:8 이하) 등을 들 수 있다.

4.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미가 4:4) 자기 땅에서 자기가 흘린 땀의 결과로서 그 열매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예언자들의 선포는 노동의 의미와 그 보람이 무엇인지 집약해 주고 있다.  

5-1. 구약성서의 법정신은 예언자들을 통해 예수에게도 계승되었다. 예수가 스스로의 몸으로 노동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에 기본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거니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선포함으로써 육체를 소진하는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였다. 그것은 자발적 의사와 상관없이 고된 노동의 조건에 시달리는 이들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5-2. 하지만 그것이 창조적 활동으로서 생명을 살리는 노동의 근본적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안식일 논쟁(마태 12:1이하; 마르 2:23이하; 루가 6:1이하)에서 예수는 인간의 존엄을 강조함과 동시에 생명을 살리는 노동의 참 뜻을 환기시킨다. 안식일에도 노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안식일의 참뜻과는 상관없이 단지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받고 있을 때, 거꾸로 예수는 안식일에도 노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생명을 살리는 노동의 근본적 의미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5-3. 요컨대 노동과 안식은 인간의 생명과 더불어 자연적 생명 보전의 필수적 조건이다.  

6-1.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소외 현상이 지속되고 있고, 특히 사적 소유권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경제 질서하에서 노동이 상품화됨으로써 노동의 소외 현상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그러한 현실에서 노동과 소유의 문제에 대한 성서적 통찰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6-2. 성서는 기본적으로 고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활수단이자 생산수단이었던 땅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땅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레위 25:23).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땅에 대한 경작권만을 갖고 있었고, 그 경작권은 가문 단위로 세습되었다. 그것은 점유권에 해당할 뿐 오늘과 같은 배타적 소유권과는 다른 것이었다.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성서의 정신은 비단 땅 자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있는 모든 물질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땅에 대한 소유권의 부정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으로 모든 피조물의 공유 대상이라는 정신의 구체적 표현인 것이다.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안병무)
6-3. 성서적 ‘정의’(체다카) 개념을 철저히 하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원상복귀시키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예언자들이 그것을 말할 때 그 의미는 구체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하여 불의한 재물이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였다. 불의한 재물이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은 차별적 소유에 의해 축적된 재산 그 자체가 불의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만물이 모든 사람의 생존을 위한 것으로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정신은 예수가 말한 ‘불의한 재물’(누가 16:9)이라는 표현 가운데서도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하는(누가 6:20) 반면 부자들을 저주하고 있는(누가 6:24) 예수의 말씀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축복과 저주는 재물의 소유 여부 그 자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재물의 소유 여부로 가난한 자와 부자가 갈리는 관계를 두고 한 말로서, 그러한 불의한 현실 관계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초대교회가 재산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지향하였다는 것(사도 2:43~47; 4:32~37)은 바로 그와 같은 성서의 일관된 정신을 따른 것이었다.
6-4-1. 물론 성서 자체에 전적으로 사적 소유 관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컨대 십계명의 도둑질 금지 조항은 모종의 소유권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배타적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성서 전반의 맥락에 비춰볼 때 여기서 전제하고 있는 소유권은 매우 제한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을 통해 삶을 꾸려갈 것을 명시하고 있는 성서의 입장에서 최소한 자신의 삶을 책임있게 꾸려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노동을 통해 얻은 소산에 대한 처분의 권리를 인정하였다고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6-4-2. 예언자들이 강조하듯이 자기가 거둔 곡식과 포도주를 빼앗기지 아니하고 자기가 누릴 것이라는 선포(이사 62:6~12)는 그러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 성서에서는 그 노동소득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권도 공동체의 이익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본질적으로 제한을 받는다. 십일조 규정은 바로 그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결국 성서 전반을 통해 볼 때 제한적으로 인정되는 소유권마저도 공동체의 보존과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데 근본 의의가 있는 것이지 배타적 소유권을 옹호하는 데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7-1. 여전히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의 소외 현상이 심각하다. “아, 보람 따위는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이렇게 항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현실이다. 노동이 인간으로서 자기실현과는 상관없다. 그나마 노동의 기회마저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7-2. 성서의 노동에 대한 통찰은 그 현실을 넘어서 인간과 자연이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길을 찾으라고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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