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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논문/강의 | 시론 | 단상 | 기타 |
“문익환의 평화사상”에 대한 논평
 최형묵    | 분류 : 기타 | 2017·10·19 22:48 | HIT : 184 |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평화인문학연구단 ‘한국인의 평화사상’ 제3차 학술회의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목련홀 / 2017년 10월 12일(목) 오후 1:30~6:00  


김형수, “문익환의 평화사상: 그의 ‘발바닥 언어’가 지상에 기록한 것들에 대하여”를 읽고

최형묵(한신대 / 기독교사회윤리학 / 민중신학)

1.
문익환은 한국 현대사의 거목이다. 어느 한 이름으로 그의 삶을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최대한 간결하게 그 이름을 집약한다면 목사, 신학자, 시인, 실천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왠지 그 이름들을 늘어놓는 것만으로는 그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기에 충분치 않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발제자는 과연 <평전>의 저자답게 그의 삶을 통째로 드러내 놓을 수 있는 길을 찾은 것 같다. 무엇보다 목사로서 언어의 달인이었던 문익환이 그 언어를 비워버리고 발바닥으로 기록해낸 삶을 전모를 포착하고자 한다. 덕분에, 우리는 저마다 관심있는 분야에서 필요한 하나의 이름으로 주목한 문익환의 어떤 면모를 그려내는 한계를 벗어나 그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발표는 주어진 주제에 집중하여 문익환의 평화사상을 조명하고 있다. 이 때 많은 경우, 특히 학자들은 지면에 기록된 언어를 주목하고 관심하는 바 주제에 집중하여 논리를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하지만, 발제자는 지면에 기록된 언어를 넘어 발바닥으로 지상에 기록한 것들을 주목함으로써 문익환이 온 몸으로 이루고자 했던 꿈을 포착해내고자 한다.

2.
발바닥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해나간 문익환에게서 전환점이 되는 계기는 그가 시인으로 불리기 시작한 즈음부터이다. “4.19를 겪고 숱한 절망의 시간들을 거친 뒤 ‘말씀의 수용자’에서 일거에 ‘말씀의 창조자’로 전환하는 반전의 수단이 시집 출간이었다.” 시 역시 또 하나의 언어 형식임에는 틀림없지만, 문익환의 시는 ‘화려한 언어조탁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아니라 삶을 온전히 드러내는 수단이요 그 삶을 이끌어가는 꿈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문예비평가들이 별로 주목할거리가 없는, 그야말로 ‘아무런 색채가 없’는 글로써 표현된 그의 시 세계는 파격적인 ‘체제 전복성’을 지니고 있었다.
계속 이어진 일련의 시집들에 나타난 문익환 시세계의 열쇠는 ‘꿈’이었다. “꿈은 기존의 것을 부정하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무한정으로 열려 있는 공간”으로 “체제의 논리를 해체하는 힘을 갖고 있”다. 문익환은 그 꿈을 선취하는 삶의 길을 헤쳐 나감으로써 스스로 길이 되어 마침내 ‘생명’의 바다에 이르게 된다(발제자가 인용하고 있는 김기석의 글 참조). 생명은 그저 연명하는 삶이 아니라, 마땅히 누려야 할 삶으로서, 그것은 일체의 죽임을 넘어선 살림을 뜻한다.    
문익환이 계속해서 시집을 내고 시인으로 불리게 된 삶의 후반부는 이른바 실천가로서 삶의 여정과 일치한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고, 평화 통일운동에 헌신한 삶의 여정이다. 1976년 3.1구국선언 사건 이래 여섯 차례 무려 12년을 옥중에서 살아야 했던 삶의 여정이다. 폭력의 세기, 그 폭력의 구조가 응축된 한반도에서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꿈과 사랑을 보여준 생명의 서사”를 보여주는 발걸음이요 몸짓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그 생명의 바다에 이른 발걸음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발바닥이 땅에 남긴 것을 보충하는 일종의 주석으로서 문익환은 <히브리민중사>와 더불어 공동의 서신 논쟁록 <예수와 묵자> 저작을 남긴다. 발바닥으로 기록한 삶의 여정을 일일이 동행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행인지? 비록 삶 그 자체 원본은 아니지만 도리없이 문자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사본을 통해 후대인들은 그 원본의 진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히브리민중사>는 제목 자체가 보여주고 있다시피 성서의 일관된 맥을 히브리 민중들의 해방 역사로 꿰뚫고 있다. 그것은 문익환이 이미 오래 전부터 관심을 기울여 온 예언자들의 해방 전통을 성서의 본류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는 가운데 그 예언자들의 선포가 민중들의 마땅한 삶을 지켜내려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데 있다는 통찰을 기초로 한 것이다. 본래 구약성서 신학자요 성서 번역가였던 문익환이 삶의 반전을 통해 체득한 통찰로 성서를 재해석한 빛나는 저작이다. 여기서 문익환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역사를 민중의 역사로 되돌리고 있다. 그의 평화사상의 중요한 기초가 여기에서 확인된다.
<예수와 묵자>에서 문익환의 평화사상의 윤곽은 더욱 뚜렷해진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유목문화가 평화적일 수 있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문익환이 평화를 역설할 때 그 강조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문익환은 평등을 평화의 핵심으로 역설하고 있다.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일상 가운데 평등이 구현된 삶의 기쁨의 차원을 뜻한다는 것을 말한다. 문익환이 성서의 역사를 히브리 민중사로 조명하고, 또한 그렇게 혼신을 다해 헌신하였던 통일운동에서 민중의 주도성을 강조하였던 것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4.
앞서 말했듯이 논평자는 발제자의 접근방식에 깊이 공감하며, 또 그 접근방식에 따라 도달한 문익환의 평화사상의 핵심에 역시 깊이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길에 놓인 덫과 같이 걸리는 대목이 있어, 논평자로서 굳이 그것을 지적함으로써 논평자로서의 임무를 다하려 한다.    
발제자가 권력이 지탱하고 있는 ‘제도’와 생명이 처해 있는 ‘현실’의 괴리를 지적하며, 이를 ‘존재’와 ‘관계’라는 편의적 구분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다. 물론 발제자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의 충일함을 향유하여야 할 민중의 삶을 가로막는 지배체제를 타파하는 데 문익환의 지향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을 과연 존재와 관계의 문제로 해명하는 것이 적절할까? 인간은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는 논평자의 입장에서는 순간 혼선과 더불어 오독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동일한 개념이라도 사용하는 문맥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오해의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더욱이 한국 현대사의 과제를 ‘존재의 근원적 안식처’를 회복하는 것이라 보고, 문익환의 생명사상과 평화사상이 뜻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라 보는 것은, 보기에 따라 상당한 의혹을 자아낼 수도 있다. 그것이 ‘동일한 언어’, ‘동일한 문화’를 공유한 ‘국가적 단일체’ 또는 ‘민족 공동체’로 동일시된다면 상당한 위험 요소를 동반하는 것은 아닐까? 발제자는 서두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문익환을 주목하였다. 그런데 만일 ‘존재의 근원적 안식처’가 ‘국가적 단일체’ 또는 ‘민족 공동체’로 귀결된다면 문익환이 타파하려 했던 어떤 체제로 회귀하는 것은 아닐까?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라는 개념은 널리 알려 있거니와, 그것은 가변적인 역사적 실체일 뿐 항구적 실체는 아니다. 발제자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것이 “과거의 어느 지점”이 아니라 “아직 가보지 못한 미래의 고향”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민족’의 범위 안에 있다면 의혹이 불식되기는 어렵다. 민중의 편에서 정의를 선포한 예언자를 주목하고, “사랑의 사회적 실천은 (정)의”라 역설하고, 성서를 히브리 민중사로 조명하고, 심지어 “예수는 계급해방론자”로서 ‘NL’이 아니라 ‘PD’라고까지 한 문익환은 과연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문익환이 “평등이 평화의 핵심”이라 강조하고 민중들이 일상적 삶의 평화를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생명 본연의 모습이라 본 것은 무엇보다 갈등하는 현실 한복판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민중들을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익환을 포함한 민중신학의 선구자들이 한국의 현대사 한복판에서 이른 통찰로서, 세계적 지평에서 보편적 공감을 얻게 된 통찰이다.
물론 민중운동과 민중신학의 선구자들에게서 ‘민족’과 ‘민중’은 별개로 인식되지 않은 면이 있다. 그것은 식민지 피지배라는 한국 현대사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민중신학에서 널리 통용된 ‘민중적 민족’라는 개념은 그러한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특정한 체제(그것이 민족이라 하더라도)에의 귀속을 지향하는 경향이 그 안에 내재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어떤 기존체제의 귀속성을 벗어난 민중의 시좌를 강조함으로써 그 혼돈으로 인한 위험성을 피할 수 있는 장치를 또한 확보하고 있다.
문익환에게서 조명되어야 할 초점은 무엇일까? 혹 발제자의 문제의식이 문익환에게서 재조명되어야 할 초점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논평자의 기우에서 비롯되는 쓸데없는 트집 잡기에 불과한 것일까?    
오늘 격화된 한반도의 갈등이 세계적 차원에서 평화를 위협하고 있고, 또한 한반도(적어도 남쪽에 한정하더라도) 안에 다양한 출신과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새삼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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