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Salrim.net - 천안살림교회 ";} // echo 내의 html 태그 부분은 마음에 맞게 수정하세요. } mysql_close(); } ?>

 


+ 교회소개
+
예배시간
+
찾아오시는길
 


+
설교
+
논단
+
성서연구
+
살림소식
 


+
자유마당
+ 놀이마당
+
토론마당
 


+
영상(음악)
+
사진
+
자료
 


+
즐겨찾기

   


[신간] <진보평론> 62호(2014년 겨울호): 특집 - 종교와 사회운동
 최형묵    | 분류 :   | 2014·12·17 15:41 | HIT : 1,382 |
편집자의 글

사회운동으로서의 종교운동의 재조명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천막촌이 자리 잡고 있는 광화문광장에서는 기이한 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천막촌 자체가 기이한 풍경인 것은 아니다. 광장은 언제나 다양한 요구들이 분출하고 소통하는 정치적 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광화문광장은 마치 한국사회의 압축판과도 같아 기이한 풍경은 한두 가지만 목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막 안에서는 세월호 사건의 진실 규명을 바라며 단식을 하는데 바로 그 앞에서 폭식을 해대는 이들의 몰염치한 행위도 분명 기이한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조금 더 시선을 돌려 주변을 주시하면 또 하나의 기이한 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그 주변에는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는 이들을 보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행위라며 저주성 발언을 쏟아내는가 하면 찬송을 부르는 기독교인들의 대열이 그것이다. 그것도 그 자체로는 그렇게 기이한 풍경이 아닐 수도 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길거리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는 풍경은 흔히 봐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민주화 이후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정치적 의제를 들고 광장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는 풍경은 익숙한 풍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천막촌 안의 여러 사람들 가운데는 종교인들, 그 가운데서도 기독교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정말 기이한 점은 바로 그들과 그들을 둘러싸고 저주성 발언을 쏟아내며 찬송을 불러대는 기독교인들의 대조되는 현상이다.
똑같은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그렇게 대조되는 행동이 가능할까? 동일한 종교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매우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종교적 신념의 표출이 가능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기는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그 극단적 대비는 우리의 역사적 상황과 더불어 극적인 성격을 띠어온 것 같다.
예컨대 1970-80년대 한국의 종교는 고통 받는 민중의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 시기는 한편의 종교, 특히 기독교의 급성장 시기이기도 하고, 그렇게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주류를 형성한 기독교가 오늘의 정치적 보수주의를 뒷받침할 만한 내적 성격을 갖추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당대 한국사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실천 또한 두드러진 시기였다. 요컨대 돌진적인 근대화와 더불어 정치적 권위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그 시절, 한편의 기독교인들은 경제개발과정에서 야기된 민중의 문제와 정치적 권위주의에 대처하는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한국의 사회운동을 배태하고 육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까지 하였다. 그것은 종교적 사회운동의 한 모형이 되었다. 그 운동은 한국의 사회운동의 발전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던 주류 기독교의 종교적 보수주의를 상당 부분 억제할 만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절차적 민주화가 진전된 이후 그와 같은 종교적 사회운동은 현저히 약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다른 사회운동 진영과 연대하는 종교적 사회운동 자체가 현저히 약화되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 보수주의가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는 현상이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즈음 광장에 나선 것은 과거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종교인들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의제에 대해 보수적 목소리를 높이는 종교인들이었다. 그것은 명백히 민주화 이후 강화된 사회적 공공성의 요구와 이념적 유연성의 확대를 자신들의 존립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한 종교적 보수주의 진영의 퇴행적 행태였다. 그들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서 높아졌을 때 기존의 종교적 사회운동 진영의 존재감은 미미해졌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종교적 사회운동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스스로 약화되었을 뿐 아니라, 여타의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조건에서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던 터에 종교적 보수주의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정치적 행동이 공공연하게 표출되는 조건에서 더더욱 그 존재감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한동안 종교적 사회운동이 그처럼 위축된 것처럼 보였던 것과 달리 우리 사회의 위기의 현상이 돌출된 현장에 종교인들의 참여가 두드러져 보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유족의 고통에 함께 하고자 하는 현장과 그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대열에 종교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민 아빠의 40일을 넘긴 단식 이후에 또 다시 40일을 넘긴 단식의 행렬을 이어간 것도 개신교 목회자들이었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종교인들이 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한 요구에 앞장서고 있다. 게다가 8월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에 경각심을 일깨우며 가난한 사람들의 자리에 선 교회의 사명을 강조한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문은 단지 한 종교 수장의 방문으로 그 의미를 축소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새삼 환기시켰다. 종교인들의 사회적 실천이 돋보인 2014년의 현상이 다소 극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보건대 근래 우리 사회의 위기가 현상화된 많은 사건의 현장에 종교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경향을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보수정권이 재등장한 그 즈음부터였을 것이다. 자유무역협정 반대 대열에서, 4대강개발사업 반대 현장에서, 촛불행진에서, 용산에서, 제주 강정마을에서, 밀양에서 종교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을 뿐 아니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의 연대 현장 등 노동투쟁의 현장에서도 종교인들의 지속적 참여는 적극성을 띠고 있었다.
이번 특집에서는 종교적 사회운동이 다시 활성화된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그와 같은 현상을 주목하였다. 최근 종교적 사회운동은 과연 다시 활성화된 것인가, 그것이 일과적 현상이 아니라 일관된 하나의 추세로서 의미를 지닐 만큼 뚜렷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사회운동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이다. 한국 현대사의 사회운동에서 종교적 사회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은 만큼 그와 같은 현상에 대해 분명한 진단을 내릴 수 있다면 종교적 사회운동 그 자체에 대한 평가와 아울러 일반 사회운동과 종교적 사회운동의 관계를 더욱 발전적으로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최형묵은 “종교운동의 사회운동적 명암”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사회운동으로서의 종교운동이 갖는 적극적 측면과 소극적 측면을 규명하기 위해 종교적 사회운동의 주요 특성을 밝히고, 그 특성들이 종교적 사회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이 글은 종교적 사회운동의 특성으로 실천의 직접성, 운동 주체들의 개별적 헌신성,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완결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적 신념 등을 꼽고 있다. 여기서 실천의 직접성은 고통의 현상에 대해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말하고, 개별적 헌신성은 종교인의 자기수행적 성격과 헌신성을 말하며,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완결된 세계관으로서 종교적 신념은 역사적인 성취를 상대화시키는 근거로서 종교적 신념의 성격을 말한다. 이 글은, 바로 그와 같은 특성들 때문에 종교적 사회운동은 한편으로는 일반 사회운동에 활력을 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균열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한국 사회에서 사회운동이 재건된 1960년대 말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사회운동의 변화과정을 세 국면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은 종교적 사회운동의 특성상 사회적 위기가 노골화되는 국면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활성화될 뿐 아니라, 나아가 다른 사회운동 특히 계급적 사회운동이 약화되는 국면에서 더더욱 두드러지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점이다. 종교적 사회운동의 활성화 여부는 사회적 위기의 격화 여부 및 그에 대한 사회운동의 성숙 여부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이 점에서 종교적 사회운동에 대한 평가는 우리 사회의 위기의 실상 및 그에 대한 사회운동의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되는 셈이다. 이 글은 종교적 사회운동과 일반 사회운동이 어떻게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지 그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지금, 민중신학에서 ‘운동’과 ‘현장’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정용택은 종교적 사회운동 자체를 직접 다루기보다는, 그 하나의 범례로서 기독교 사회운동의 전개과정에서 형성되고 다시 그것을 뒷받침하는 민중신학의 과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 글은 민중신학이 민중운동에 동참하는 실천을 통해 형성된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사실은 그보다 앞서 고통 받는 민중의 실재 그 상황으로부터 촉발된 성격을 강조한다. 그 강조점이 새삼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하나의 운동으로서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은 민중들의 실재를 주목하고 민중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그 상황 자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극복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신학적 인식이 갖는 근본적 대안의 철저성과 동시에 과학적 인식이 추구하는 현실 인식의 철저성을 종합하는 과제를 지향하고 있고, 그것은 곧바로 사회운동의 철저성으로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기독교 사회운동 주체들 내부에서는 현재의 국면에서 기독교 사회운동이 과연 활성화되어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근본적 의문을 갖고 있다. 여전히 그 내부에서는 과거의 실천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실천 그 자체의 측면에서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천이론의 측면에서 어떤 돌파구가 있는지 부심하는 와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천현장에 발 벗고 나선 후배에게 주는 편지 형식으로 된 이 글은 기독교 사회운동 주체들 내부에서의 그 분투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복음교황 프란치스코와 한국사회”에서 김선필은 한 종교 지도자의 방문 이상의 의미를 갖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방문 의의를 다루고 있다. 제목 자체가 시사하듯이 이른바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넘어 진정한 가르침으로서 ‘복음’을 온전히 구현하고자 한 교황 프란시스코의 삶의 여정 및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과 실천의 전통을 상세하게 조명한다. 그 가운데에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타난 우리 사회의 열광의 의미를 짚어내고 있다. 무엇보다 교황의 행보가 그의 평소 소신대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보인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뜨거운 반응은 해결되지 않은 채 산적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열망에 조응했던 것이다. 물론 교황이 우리 사회 고통의 현장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구체적인 사람들을 만난 것만으로 문제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평범한 사람들의 기대에 호응한 교황의 행보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은 적어도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확인시켜주는 효과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교황의 행보는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분명하게 일깨워준 중요한 하나의 계기임과 동시에 사회 자체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계기로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음을 이 글은 잘 부각시켜주고 있다.
애초 “종교와 사회운동”의 표제를 내걸고 특집기획을 하였던 의욕만큼 충분한 내용을 담지 못한 것은 아쉽다. 종교적 사회운동 전반을 포괄할 수 있는 내용을 담지 못하고 주로 기독교(신교 구교 포함하는 의미에서) 사회운동만을 담을 수밖에 없었던 한계, 더불어 종교적 사회운동을 좀 더 다각적인 측면에서 다루는 내용이 충족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한동안 부정적 맥락에서만 다뤄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사회의 종교 실태에 대한 접근에서 벗어나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종교적 사회운동을 재조명하고자 한 시도는 적극적 대안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환기시킬 뿐 아니라 종교적 사회운동과 일반 사회운동의 건설적 관계를 모색하는 계기를 만든 셈이다. 아쉬운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특집의 의의를 여기에 두며, 향후 이에 관한 좀 더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이번호에는 시평으로 김도민의 “다시 함께 광화문으로 걸어야겠다: 세월호참사와 분단체제를 넘어서”를 실었다. 이 글은 무책임한 국가폭력이라는 객관적 폭력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바로 분단체제임을 밝히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특경대(特警隊)라는 특별경찰이 이미 수사권을 가졌던 선례가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무책임한 국가의 출발점이자 분단체제의 시작이 곧 반민특위의 해체였다며 수사권을 가졌던 강력한 반민특위도 국민이 지속적인 감시와 지지를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해체되어버린 한국현대사의 경험을 상기한다. 그리고 조사권만 지닌 세월호진상위원회가 진실을 규명해 내기 위해서는 더더욱 국민의 끊임없는 감시와 지지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지난 호에 이어 쟁점란에서도 전교조 운동을 다뤘다. 지난 61호는 하성환의 “전교조 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적 제언”과 이를 비판한 이철호의 “전교조, 불순한 정치를 말하다: 하성환의 ‘전교조 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적 제언’을 비판하며”를 게재한 바 있다. 이번호에는 이철호를 재비판하며 하성환이 “교육노동운동, 성찰과 전망”을, 그리고 하성환의 이 글에 대한 비판으로 다시 최덕현이 “전교조운동의 성찰과 전망: 하성환의 ‘교육노동운동 성찰과 전망’을 보며”를 썼다. 전교조에 새로운 집행부가 탄생했다. 이 네 편의 글에는 전교조 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발전방향에 대한 성실하고 치열한 활동가의 풍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이 글들이 전교조 운동의 성찰에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

이번호 정세란에서는 공무원연금개혁을 비판한 이희우의 “존재목적을 상실한 연금개혁 어떻게 하나?”를 실었다. 이 글에서는 새누리당 공무원연금 개정안의 문제점에 대해 이해당사자 배제, 공무원연금의 특수성 무시, 재정건전성문제의 원인에 대한 정부의 책임, 공적연금의 적정성, 공직부패 확산과 인재유출, 공적연금 무력화와 사적연금 활성화라고 보고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리고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 40%를 기준으로 한 공무원연금의 하향평준화는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 40%에서 50%로의 인상 논의에 찬물을 끼얹게 될 것으로 우려한다. 국가부담능력에 부합하면서 노후소득보장의 효과가 있는 최적의 소득대체율을 목표로, 공적연금시스템(기초연금,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등) 전반에 대해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논의를 시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살을 에는 날씨다. 오늘도 광화문 전광판 위에서 씨앤엠 노동자 두 분이 20일 넘게 농성을 하고 있다. 왜 이렇게 가혹한 상황일까? 정세란의 박재범은 “케이블·통신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선 이유”라는 글을 썼다. 삼성전자서비스,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씨앤앰·티브로드 케이블방송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최근 벌어진 투쟁을 다루며 전자·통신·케이블방송 등 서비스산업 전반의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착취 실태를 고발한다.

국제란의 이유철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과 한반도에 주는 함의”를 보내왔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새로운 냉전체제에 관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들은 친 EU 세력과 친 러시아와의 갈등관계로 단순화시켜 민주 대 반민주의 흐름으로 분석해 내지만 이는 탈냉전 이후 미국 주도 동맹체제인 NATO의 동진, MD체제의 확장, 나아가 미국의 패권체제의 상대적 쇠퇴라는 국제적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본다. 또한 동부와 서부 주민들이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공유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개혁 경험 및 인식의 불일치에 대한 설명을 사장시키고 만다고 본다. 따라서 이 글은 기존 주류학자들의 단순한 패권중심적 분석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역사와 신자유주의적 정책 실패를 갖고 우크라이나 사태를 재해석한다.

일반논문으로 이영롱의 “‘영원한 미생未生’만을 위한 노동 공간 : 30-40대 직장인의 노동서사를 통해 본 신자유주의 노동의 성격”을 게재했다. 이 글은 불안한 노동현실 속에서 과감하게 실존적 결단을 통해 다운시프트한 청년 노동자들의 서사를 보여주는 현장 지향적인 글이다. 따라서 현 시기 청년노동자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 이 시대의 노동자 형상의 중요한 단면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해준다. 이 글의 노동자들은, 실업의 고통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 청년세대 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사회문화적 조건을 지닌 부류로 새로운 세대가 모색하는 여러 가능한 삶의 경로들 중 하나를 일상 속에서 어떻게 모색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반논문으로 심아정의 “우파적 감성과의 사상사적 대결: 오에 겐자부로의 「세븐틴」과 후지타 쇼조의 ‘불량소년’에게 길을 묻다”에서는 최근 일본에서 등장한 넷우익, ‘재일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을 비롯한 ‘행동하는 보수’세력들을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사상사(思想史)적인 참조점을 찾고 있다. 그들은 ‘기성 보수우익세력과의 차별화’와 ‘극단적 국가주의’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전후 우익을 많이 닮아있으면서도, 천황에 대한 인식은 기존 우익의 내러티브를 공유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이를 위해 근대 일본의 좌우의 분리의 기원인 오사카 사건, 그리고 아사누마 사건과 「세븐틴」의 죽음, 전시 비행소년에게서 포착되는 불량정신의 찬란함에 대해 분석한다. 전후 일본에서는 우익의 창궐에 대해 지식인의 심도 깊은 분석과 성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베 등이 가시화된 우리에게 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성찰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소수자이야기로는 윤수종의 “거지와 국가”를 실었다. 이 글은 신문기사에 나타난 기사를 중심으로 1945년 이후의 거지의 실태와 생활, 그리고 국가의 단속과 수용에 주목한다. 사회의 가장 주변부에 밀려난 사람들을 국가가 어떻게 처분해 왔는지,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유지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글이다. 거지들은 언제나 ‘배부른 구속’보다 ‘배고픈 자유’를 갈망한다. 물론 그들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된 밥을 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물과 잠자리를 제공하여도 그들을 억압하는 무엇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반항한다. 반항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탈출이다. 거지들은 뭇 사람들과 같이 자유에의 갈망이 강렬하다.

이번호 다시읽기는 “‘이윤율의 경제학’에서 ‘소득의 정치학’으로?: G. 뒤메닐과 D. 레비의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읽고”를 송종운이 썼다. 그는 이 책의 저자들이 마르크스경제학자임에도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적 동학을 ‘이윤율의 경제학’이 아닌 ‘소득의 정치학’으로 해석하고 관리자 계급과 민중 계급의 ‘동맹’을 주요 대안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전후 고성장의 시기에서나 가능한 계급타협론에 불과하다. 저자들은 2008년의 위기가 이윤율 저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며, 수익성은 증가하고 있다고 보고, 이를 신관리자본주의라는 계급타협론의 물적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위기󰡕가 가지는 편향과 한계를 규명하고 이것이 어떻게 극복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토론해야 하는데, 이는 󰡔위기󰡕는 그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 경제학의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진보평론의 후원단체로 있는 일곡기념사업회 학술상, 7회 수장작의 수상소감, 심사의 변을 게재하였다. 일곡 유인호 선생(1929-1992)은 한국 사회에 경제 민주화, 농업 협업화(요즈음 한창 회자되는 표현을 빌리자면 농업 ‘협동조합’을 통한 발전 방안), 공해 문제 등을 처음으로 제기한 경제학자다. 1980년에 민족·민주 경제학을 주창했고 민중의 삶과 현장에 초점을 맞추고 민중경제학자, 비판경제학자로서 독재 정권이 낳은 고도성장의 그늘을 비판했다. 또한 자신의 학문적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실천가이기도 하다.
일곡기념사업회는 고인의 학술연구와 실천의 궤적을 재조명하고 후학양성의 일환으로 2008년 학술상을 제정하여 매년 수상해 오고 있다. 올해로 7회째를 맞이하여 이번 수상작은 김정한의 󰡔1980 대중봉기의 민주주의󰡕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적 깊이와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글들을 보내주신 필자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미흡한 점은 독자들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라며 지지와 비판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2014. 12. 5.
편집위원 최형묵


* 최형묵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4-12-25 20:10)
스팸방지코드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새로고침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결정에 대한 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와사회위원회 성명 [1]  살림교회 14·12·19 1362
  [신간] 정의 평화 교회 -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30주년 기념 설교집  최형묵 14·12·05 1347
Copyright 1999-2017 Zeroboard / skin by GGAMBO

   

   

   
   Best viewed with Internet Explorer 6.0 & resolution 1280*960     Copyright ⓒ 2005 salrim. All rights reserved.
   
교회  330-938 충남 천안시 동남구 신방동 72-6 현대프라자 3층 ☎ 577-1893  사택 330-882 충남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647-14 ☎ 552-1893
 
  chm1893@chollian.net    교회구좌 국민은행 011237-04-005841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