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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숙한 세계에 의문을 제기하기 - 누가복음 18:28~30[음성]
 최형묵    | 분류 :   | 2017·09·24 15:38 | HIT : 186 |
2017년 9월 2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친숙한 세계에 의문을 제기하기  
본문: 누가복음 18:28~30



오늘 우리는 매우 ‘과격한’ 예수님 말씀의 한 대목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말씀을 멈칫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과연 말씀 그대로 편안하게 받아들여집니까?
다시 한 번 본문말씀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버리고서,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보상을 받을 것이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받을 것이다.’”
딱 잘라 말하면,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자기에게 가장 친숙한 관계를 끊으면 오히려 더 많은 보상을 받고 영생을 누리리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앞의 내용과 연결되는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앞의 내용을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돈 많은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구원의 도에 관해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예부터 내려오는 계명을 준수할 것을 말합니다. 십계명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들입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러자 그 돈 많은 사람은 그런 것들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잘 지키고 있다고 답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 말을 들은 그 사람은 근심합니다. 근심에 사로잡힌 그를 두고 예수께서는 말합니다. “재산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좀처럼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할 줄 모르는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수근거립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 부자는 탐욕스러운 부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대개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만, 유복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탓이라고 생각하였고, 더욱이 유복한 사람들은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올바른 생활을 하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그 상식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본 제자들도 조바심이 났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말문을 꺼냅니다.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버리고서 선생님을 따라 왔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면, 자신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겠느냐고 확인받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자기 소유를 버리고 따랐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런 만큼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현실에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 차원을 더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보상을 받을 것이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받을 것이다.” ‘그래, 그만하면 됐다.’라고 했으면 좋았을 걸, 거기다 더해 한 가지를 더 추가함으로써 제자들을 바짝 조이는 격입니다. 더 추가된 조건은 가장 친숙한 기존관계의 단절 내지는 포기의 차원입니다. 소유의 포기에 더하여 그 소유를 보장했던 친숙한 기존관계의 완전한 단절을 더한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인륜을 저버리라고 말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기존의 삶의 안위를 보장하는 모든 조건에서 떠나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구원을 받는 것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기존의 소유 및 관계와는 완전히 단절한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현실을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누리는 것에 대해 예수께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보상을 받을 것이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받을 것이다.” 영생을 누린다는 것은 장차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뜻하는데, 이 세상에서 또한 여러 갑절로 보상을 받을 것이라 합니다. 대개 예수께서는 보상에 관해서 별로 말씀을 하지 않는데 반해 누가복음의 이 대목에서는 현세에서의 보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상의 논리를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복음서의 저자가 굳이 이 대목에서 보상을 말하고 있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보상이 흔히 생각하는 일대일의 보상 차원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과 아내와 형제와 부모를 버리라고 했는데, 그 손실들에 대해 맞대응관계로 보상을 받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이 몇 갑절 되는 것은 괜찮을까요? 아내가 몇 갑절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형제가 몇 갑절 된다는 것도 받아들일 만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또 부모가 몇 갑절 된다면 어찌 되는 것일까요? 너무 짓궂은 물음인가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상은 기존의 관계의 차원을 떠난 보상을 뜻합니다. 기존의 사회적 관계와 그 안에서의 통념에 따른 보상과는 다른 보상을 말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기존의 친숙한 가족관계에 대한 집착을 포기했을 때 새로운 가족관계가 열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가족은 사람에게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안정의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은 자기본위의 삶을 고착화시키는 가장 강고한 결속체이기도 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언제나 자기 부모와 자식의 편일 수밖에 없으며, 사회적 정의에 반하는 경우조차도 때로는 인륜을 명분으로 가족을 보호하는 것을 우선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가족관계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그 가족을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혀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 말고는 모두 적대적이거나 경쟁의 대상이었던 기존의 가족관계와는 다른 새로운 가족관계, 곧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와 같고 부모와 같고 아내와 같이 되는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기적 욕망을 앞세우는 소유관계와 인간관계를 포기하면 새로운 삶의 차원이 열린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그 엄청난 이야기입니까?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 예수께서 답하셨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배적인 주류의 상식을 거스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욕망과 탐욕을 극복할 수 없고, 따라서 바로 그 동기를 보장할 때만 경제의 질서와 정치의 질서, 일체의 질서가 가능하다고 믿는 주류의 상식을 거부할 것을, 오늘 본문말씀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그러면 더 잘 산다. 아니 인류의 생명이 더 이상 위기를 겪지 않고 영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긴 말이 필요할까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기적인 탐욕과 지배욕, 그리고 그 욕망에 기초하여 끊임없이 타자를 배척함으로써 존속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사회질서, 이 가혹한 세계질서가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존속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오늘 본문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소위 상식적인 세계, 친숙한 세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 선포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결코 간단치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 말씀의 뜻을 암만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해도, 기껏해야 일종의 타협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그 말씀의 근본 뜻을 자각하고 있는 것과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큰 차이를 낳습니다.
그 뜻을 자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로 우리 자신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 밖의 타인에게 나를 열어두는 것을 뜻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두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 말씀의 진정한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아집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맡기라는 뜻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그 말씀의 뜻을 자각하지 못할 때 어떻게 될까요? 언제나 자기 세계 안에 머물 뿐입니다. 언제나 현상유지를 최선으로 압니다. 그 현상을 변경시키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든 두려움을 갖고 경계를 설정합니다. 타인을 배제하고, 심지어는 악마화하기까지 합니다. 내 곁의 타인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을까요? 인간인 한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타인과 더불어 비로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장로교 총회들이 열렸습니다. 똑 같이 102회 총회를 맞이했던 예장통합과 기장의 결의 가운데 사회적 관심을 끌었던 사안에 대해 말하면, 예장통합은 동성애자의 신학교 입학 불허 및 일체의 교직 임직 불허를 결의했습니다. 기장은 동성애자 교인 목회 지침 마련을 위한 연구위원회 구성 안건을 또 기각했습니다(159:90). 2년 전에 비해 지지율이 절반 정도 올라 간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할까요?  
한국 교회는 친숙한 것에 그저 익숙할 뿐 새로운 세계로 나서는 데 두려움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올해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만, 그 종교개혁을 기념할 뿐 자신의 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갈 길이 멉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것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사람들에게, 그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새기는 가운데 진정으로 새로운 삶의 희망을 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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