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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 마가복음 9:17~29[음성]
 최형묵    | 분류 :   | 2017·10·08 14:29 | HIT : 206 |
2017년 10월 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아이 캔 스피크!”
본문: 마가복음 9:17~29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준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믿음’과 ‘기도’가 강조되고 있는 까닭에, 믿음과 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말씀으로도 기억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전형적인 태도가 나오기도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금과옥조가 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모든 일에 앞서 기도의 능력이 중요시됩니다. 신앙인들의 바로 그와 같은 태도는 오늘 말씀에서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옳습니다. 불가능을 뛰어넘는 믿음의 중요성, 그 모든 일에 앞서는 기도의 중요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땅히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믿음이 맹목적 신앙을 의미하고, 기도가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바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과 기도는 단지 주술적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믿음과 기도는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법 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오늘 본문말씀은 그  자체로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의 문맥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앞의 문맥과 관련해서 보자면, 바로 앞의 이야기는 변화산상에서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산상에서 내려와 바로 벌어진 일을 오늘 본문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맥은, 영광스러운 하늘의 현실과 대비되는 땅의 현실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자체의 내용을 주목할 것 같으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이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본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전후사정을 훨씬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소년을 괴롭힌 귀신의 실체 또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17절에서 그 귀신은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 곧 ‘벙어리 귀신’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수군거리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때 이 소년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말하지 못하게 하는 귀신’에 들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25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귀머거리 귀신아” 하고 외칩니다. 이 사실을 통해 볼 때, 이 소년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의 실체는 귀를 틀어막고 말문을 막아버린 어떤 힘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막연히 정신착란증을 일으키는 힘이라기보다는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게 하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힘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년의 발작증상, 곧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고,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는 증상도 돌연한 한 순간의 증상이라기보다는, 귀먹고 벙어린 된 데에서 나오는 이차적 증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원인과 증상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해명해야 하고, 질병의 실체를 뭐라 해야 할까요? 일반적 의미의 정신질환이라 해도 될 것이며, 간질병과도 같고, 또는 자폐증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대의 교부들도 오늘 본문의 기사를 놓고 의학과 신학, 의술과 신앙의 관계에 관한 많은 논란을 벌이기는 했지만, 이 시간에 이 증상에 관한 의학적 진단은 제가 할 수 있는 몫은 아닙니다. 이 소년에게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사실은, 이 소년이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병에 시달렸다는 사실입니다. 대개 듣지 못하면 말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이 증상에 주목한다면, 이 소년이 앓고 있는 병을 ‘실어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로 듣지 못하니 입으로 말하지도 못하는 병, ‘실어증’입니다.
실어증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잘 알고 있으나 명확하게 말로 표현 못하거나 혹은 타인이 말한 언어를 이해하는 데 장애를 일으키는 병증”입니다. 자기의 말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남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진 병입니다. 소통의 능력을 상실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병입니다.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 너와 내가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 그런 관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삶을 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정신이 온전할 리 없습니다. 미쳐 날 뛸 수밖에 없습니다.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 고립된 상태에서 침묵의 명상을 하는 것과는 달리, 알 수 없는 어떤 힘 때문에 자신도 어쩔 도리 없이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누구나 그 정신 상태가 건강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맺고 있는 관계들이 원만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전하고 받고, 말하고 듣고 하는 소통이 원만하지 않으면 누구나 괴로운 법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소년은, 극단적인 정신이상 상태의 환자만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소위 정상적인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어떤 사연으로 남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거나, 또 그 어떤 사연으로 내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오늘 모든 사람의 처지를 대변하는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서로 내뱉는 말은 많되 진정으로 속마음이 통하지 못하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언제나 나의 실리를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자신만의 세계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들과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을 죽이고 살아가는 오늘의 많은 사람들, 또한 나아가 자기 세계에 갇혀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그래서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아무렇지 않게 유포하는 불행한 교회의 현실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실어증에 걸린 소년은 오늘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핵심적 소재가 실어증에 걸린 소년인 것은 틀림없는데, 표면적인 이야기 서술에서 그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고, 그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든 능동적인 주인공들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소년의 아버지,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종일관 대화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적어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소년이 실어증에 걸리고, 또한 그 실어증으로부터 치유를 받을 수 있게 되는 사태의 원인이 그 소년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이른바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더불어 진짜로 실어증에 걸린 사람들은 스스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냐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실어증, 즉 관계의 파탄, 서로 통하지 못하는 삶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오늘 성서 본문말씀은 그 원인을 직접 밝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소년이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고 그 아버지의 입을 통해 밝히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년을 괴롭힌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 그 원인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믿음 없음’, ‘믿음의 부재’가 그 원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믿음의 부재’가 그 원인입니다.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님의 제자들더러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했지만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의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를 한탄합니다. 이 말씀은 어찌 보면 무능한 제자들을 질책하는 말로만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은 제자들에게 한정된 말이 아니라 당대의 모든 ‘세대’를 두고 하는 한탄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시피 모든 사람에게 믿음이 부족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그렇다는 사실은, 그 믿음 부재의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전합니다. 결국 믿음이 있었다면 그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능히 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러지 못하였다는 예수님의 한탄과 질책은, 그 소년의 병이 바로 그 믿음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믿음의 부재, 다시 말해 불신이 서로 마음을 통할 수 없게 만들고 관계의 파탄을 불러일으켰으며, 급기야는 한 사람의 인격마저 파탄시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프란츠 파농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카리브 연안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 원주민 출신 정신과 의사로서, 스스로 프랑스 국적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알제리의 민족해방운동을 돕다 36살의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실천가이자 사상가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특히 귀신을 쫓아내는 이야기를 볼 때마다 늘 그가 연상됩니다.
그가 알제리의 정신병원에서 일할 때의 일입니다. 대개 정신병원의 관행이라는 게 환자들을 폐쇄병동에 가둬두고 심리치료 내지는 약물 치료를 하는 게 고작입니다. 그러나 파농은 병원에 과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곧 환자들을 자유롭게 활동하게 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그 결과 눈에 띄게 환자들의 치료율이 높아져 많은 환자들이 퇴원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그 효과가 유럽계 백인들에게는 확실한 반면 아랍계 또는 흑인계 원주민에게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파농은 고심 끝에 그 원인이 ‘언어’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프랑스어를 쓰는 백인들에게는 자유롭고 활동적인 치료행위가 효과를 발휘하지만, 프랑스어를 모르는 원주민들에게는 전혀 치료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통역이 있기에 겉으로 보기에 의사소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원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그 프랑스어는 식민 지배자의 언어일 뿐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고통을 강요한 지배의 언어일 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파농은 스스로 알제리 원주민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이해함으로써만이 그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칩니다.
요컨대, 프랑스어라는 의사소통 수단은 원주민들에게는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지배자의 언어일 뿐입니다. 그 수단에 기대는 한 ‘믿음’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원주민들의 치료를 가능케 하는 ‘믿음’은 단순히 개인 심리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사회문화적 환경 자체가 이해되고 존중될 때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를 한탄하신 것은, 바로 그러한 상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표피적인 종교적 믿음, 교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근원적인 믿음, 신뢰를 말한 것입니다. 또한 개인의 심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차원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국, 실어증 걸린 그 소년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시하신 셈입니다. 그 소년이 누구라도 붙잡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그 소년이 편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인간적 사회적 관계, 그것이 믿음을 회복시키는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실어증에 걸린 소년을 치유하는 방법입니다. 믿음, 그것은 바꿔 말하면 사람들 사이의 소통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 믿음이 없었기에 소년이 실어증에 걸린 것이라 진단하고, 사람들에게 믿음의 힘을 일깨우셨습니다.  

지난 추석연휴기간 중에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입니다. 자신이 생활근거지로 삼고 있는 시장통에서 벌어지는 온갖 부조리한 현실을 보며, 끊임없이 그 부조리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구청에 민원을 제기하는 할머니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애를 씁니다. 구청의 모든 직원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극성인 할머니가 영어를 배우려고 하는 까닭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반전을 이룹니다. 그 할머니가 영어를 배운 까닭은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진실이지만, 가족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한 처지였으니, 사회로부터 또한 인정받을 수 없어 그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먼저 영어를 익혀 그 진실을 증언해왔던 친구가 쇠약해져 가자 그 몫이 자신의 몫일 될 것이라는 예감으로 준비해왔던 할머니는 드디어 미국의 의회에서 “아이 캔 스피크”를 외칩니다.
자신이 겪은 진실을 말하지 못했을 때 그 주인공은 일종의 강요된 실어증 상태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 실어증을 강요하는 현실이 얼마나 집요한지 영화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벽을 헤치고 “아이 캔 스피크”를 당당하게 외칠 때, 정작 실어증에 걸린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은 사람들, 진실을 말하지 않은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다고 질책하면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내쫓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내 쫓을 수 없다.” 소년에게 실어증을 강요한 힘, 실어증을 불러일으키는 귀신을 내쫓는 방법은 기도 밖에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근원적 차원에 대한 일깨움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여러분!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 사람과 통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든 바깥 세계와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대해 마음을 열어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을 둘러쌌던 벽을 허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믿음을 강조하고 기도를 강조한 것은, 사람들 사이의 소통하는 관계를 만들라는 것이요, 그 관계를 만들기 위해, 고착되어 있는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트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바라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서로 믿고 통하는 마음, 하나님과 통하고 사람과 통하는 거기에서 귀가 열리고 말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불가능해 보였던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와 사회적 관계가 그와 같이 서로 믿고 통하는 관계가 되기를, 이 시간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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