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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평화를 실현하는 삶의 윤리 - 마태복음 10:34~39; 5:38~42[음성]
 최형묵    | 분류 :   | 2017·11·05 16:30 | HIT : 95 |
2017년 11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리스도의 평화를 실현하는 삶의 윤리  
본문: 마태복음 10:34~39; 마태복음 5:38~42



오늘 마태복음의 두 본문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10:34~39 말씀, 그리고 5:38~42 말씀입니다. 본래 본문말씀은 제시된 성서일과 본문 가운데 설교본문으로 지정된 말씀을 따르고, 더불어 제시된 본문들은 참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참고해야 할 본문 또한 더불어 함께 읽었습니다.
왜 그래야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는 10장의 말씀을 보고 난감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난감해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아무런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성서일과에 더불어 제시된 본문으로 5장의 말씀을 펼쳤습니다. 몇 가지 열거된 사항들이 있는데, 통상 그 내용을 통합해 말하자면 보복하지 말라는 것으로 집약되는 말씀입니다. 그 논조로 보면 완전히 10장의 말씀과는 상반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난감함이 상쇄될까요? 그런 기대로 5장의 말씀을 펼쳤지만,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역시 아무런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집니까?

몇 주 전(9/24) 유사한 말씀(누가복음 18:28~32)을 본문으로 함께 나눈 후 한 교우께서 심각한 물음을 던져온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 두 본문말씀을 두고도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 본문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성서해석에 관한 짧은 강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수요 성서연구를 진행할 때 늘 충분히 나눈 이야기이지만, 주일 예배의 설교만을 통해서는 전혀 공유가 되지 않는 것 같아 오늘은 불가불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통상 성서 해석의 방법이나 과정은, 설교자가 기본적으로 전제하더라도 그것을 설교 그 자체 안에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만(강의가 아니기에),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난감한 본문말씀을 대한 만큼 오늘은 간략히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예배 중이기에 아주 간단히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서본문을 해석할 때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이른바 문자주의적 해석입니다. 문자 그대로 표면적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이른바 축자영감설에 이릅니다. 글자 한 자 한 자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기에 어떤 인간적 해석도 덧붙여서는 안 된다는 태도입니다. 일체의 비평과 해석을 삼가는 태도입니다.
정말로 성서본문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 그게 가능할까요? 그 방법은 그 방법 자체 안에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 해석의 방법이 한국교회 안에서는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정말 그런 방법을 따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다 자의적으로 편리한 대로 성서본문을 끌어다 쓸 뿐입니다. 가능하지도 않은 그 방법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태도일 뿐입니다.
성서본문은 진지한 해석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래야 그 깊은 의미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해석을 위해서는 분석도 필요하고 비평도 필요합니다. 역사적 맥락도 고려해야 하고 본문 자체의 문맥도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 말씀이 함축하는 깊은 뜻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방법과 해석을 전제할 때,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성서본문에 대해 분석과 비평을 통해 접근할 때 본문의 내용이 오늘의 상식과 통념에 반하면 곧바로 그 본문을 제거하거나 일축해버리는 태도입니다. 언뜻 보기에 상당히 합리적인 방법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이 역시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서 본문의 의미를 우리의 상식과 통념에 가둬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위험성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서 말씀은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해주는 수단이 될 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차원의 깨달음으로 인도해 줄 수 없습니다. 이 방법은 문자주의와 전적으로 상반되는 태도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 역시 문자주의적 태도의 다른 이면일 뿐입니다. 그 역시 표면의 문자적 의미에 집착하는 태도일 뿐입니다.
성서 본문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정말로 깊은 통찰력으로 본문말씀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표면의 의미에 집착하기보다는 정말 깊은 의미에 이르기 위한 숙고가 필요합니다. 왜 그 말씀이 등장하는지 그 배경과 동기를 충분히 헤아리는 태도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 그것이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헤아리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차피 성서는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기에 어떤 본문의 의미는 오늘의 상황에서 어떤 적합성을 갖기 어려운 것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의 상황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는 전제에서 볼 것 같으면, 성서는 그 전반적인 취지에서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도 변함없이 의미 있는 말씀, 살아 있는 말씀이 되고 있고, 구체적인 본문들 또한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도 의미있는 말씀이 됩니다.  
말하자면 그 요체는 그 표면적 의미에 집착하지 않고 깊은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 깊은 의미를 깨닫는 데 진정한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이 본문말씀은 ‘저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네요.’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나무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해를 전제로 하고 오늘 본문말씀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오늘 첫 번째 본문말씀, 곧 10장의 본문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깨트리는 선포로 시작됩니다.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 병행구절에서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며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분열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갈라 설 것이라고 합니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미가서 7장 5~6절에 그대로 나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아라. 친구도 신뢰하지 말아라. 품에 안겨서 잠드는 아내에게도 말을 다 털어놓지 말아라. 이 시대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대들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다툰다.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사람일 것이다.” 미가의 예언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선포하였던 이사야와 같은 시대 같은 배경에서 나온 예언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셨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참으로 난감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니요! 더구나 가장 가까운 가족이 원수가 된다니, 큰일 아닙니까? 하기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으며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는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가족들의 종교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그러한 상황도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와 같은 종교간 대립을 전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세상의 질서 곧 ‘로마의 평화’를 전제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정치력과 군사력 경제력으로 지배하고, 그 힘에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로마의 평화’의 허구를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허구적 ‘평화’를 깨트리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단일한 가치관과 질서에 의해 봉합된 평화, 강요된 평화를 깨트리고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질서를 그대로 용인하고 누리는 가족의 평안이나 심리적 안정감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 허구적 평화를 눈감아버리고 우리 가족만 평안을 누리고자 했을 때 그 평안은 궁극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 가장 믿고 있는 가족들 사이에서의 분열과 불화까지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가족 사이에서의 불화뿐이겠습니까? 여기저기서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믿고 있던 가족들 사이마저도 예외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로마의 평화’를 깨트리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의 평화’는 힘의 우위를 전제로 하는 평화입니다. 오늘날 ‘아메리카의 평화’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들 중심으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쟁도 감수할 수 있다는 평화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수단이야 어찌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 목적뿐 아니라, 그 과정과 수단까지도 평화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두 평화가 대립될 때 파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 절실하게 그 의미가 다가오는 말씀 아닙니까? 촛불항쟁으로 탄생한 현 정부는 남북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평화적 접근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은 지난 주간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그 원칙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반도 평화정착, 한반도 비핵화, 남북문제 주도적 해결, 북핵 평화적 해결, 여기까지는 좋은데, 마지막 다섯 번째로 북 도발엔 단호한 대응이라는 앞의 네 가지 원칙과 상반되기는 합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평화주의적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반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하여 북에 대한 응징과 제제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북핵 문제를 더 키워오지 않았습니까? 내일 모레 예정된 국회 연설에서 제발 자극적인 발언을 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두 번째 5장의 본문말씀은, 그 표면의 문자적 의미로 보자면 첫 번째 10장의 본문말씀과 상반되지만,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10장의 말씀이 그 심층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역설한 데 있다는 것을 전제할 것 같으면, 그 평화를 이루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일관된 맥락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5장의 본문말씀은, 5장 그 첫머리에 유명한 산상수훈이 등장하고, 말미에 원수사랑에 관한 가르침 가운데 바로 원수사랑과 곧바로 이어지는 맥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말씀을 확인하겠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첫 구절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을 환기합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탈리온법(동태복수법)입니다. 본래 이 법의 취지는 보복의 남용을 방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 법은 그 본래 취지와 달리 응징을 정당화하는 법칙으로 통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현실을 먼저 전제합니다. ‘그것이 상식이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악한 사람과 맞대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보복과 응징이 최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제가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정신과 의사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상대가 공격해올 때 맞대응하기보다는 일단 공감을 표하면 그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시도하는 현대과학이 도달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그 진실을 통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한 술 더 뜹니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대주라고 합니다. 어떤 해석자는 ‘때리려면 때려라’ 하는 태도는 더 강력한 저항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고 해석합니다만, 꼭 어긋난 해석은 아닙니다. 여기서 오른 뺨을 치는 행위는 상당한 모욕으로 간주되는 행위입니다. 보통 오른 손잡이가 뺨을 칠 때 때리는 뺨은 왼쪽 뺨입니다. 그런데 오른 뺨을 친다면, 그것은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치는 것을 뜻합니다. 뺨을 치는 것 자체가 상대에 대한 모욕을 뜻하지만, 그것도 손등으로 치는 건 더 심한 모욕을 뜻합니다. 여기다 대고 왼 뺨을 들이미는 건 제대로 때려달라는 의미일까요? 아무튼 상대의 행위에 대한 맞대응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재판시 담보물로 속옷을 내놓으라 하면 겉옷까지 주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잠잘 때 이부자리로 대용하는 겉옷까지 담보물로 잡아서는 안된다는 구약의 율법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예 벌거벗은 존재가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합니다. 단순한 길 안내를 연상하기 쉽지만, 사실은 로마군대가 점령지 민중들을 끌고 짐을 나르게 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것이 딱 그런 상황입니다.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고 그 요구를 들어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진의는 도마복음(95)에 훨씬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아예 받을 생각 말고 꾸어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판단할 때 참 난감하지요? 일단 상대에 공감하라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희생까지 감수하라는 이야기는 받아들이기 참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근본 뜻, 깊은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적의를 가진 상대에 동일한 적의로 맞대응해서는 그걸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적의를 무력시킬 행동을 취할 때 근본적으로 그 적의를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철저하게 상대의 입장에 설 뿐 아니라 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갈 때 상대는 멈칫할 수밖에 없고, 결국 상대의 성찰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다는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정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의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적의를 물리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납니다.  
물론 이 가르침은 철저하게 일대일 개인간의 대면관계에서 타당한 윤리적 원칙일 수 있습니다. 집단이나 국가간에도 그 원칙이 타당성을 지닐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그 문제를 통찰했습니다. 개인간의 관계에서는 도덕적 선의가 통용될 수 있지만, 집단이나 국가간에는 그런 선의가 통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집단간에는 윤리가 아니라 정치가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그 통찰은 중요하지만, 니버는 결국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미국의 힘의 우위에 입각한 외교정책을 정당해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습니다.
물론 개인간의 윤리적 원칙과 방법이 집단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방법이 일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윤리적 원칙은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적의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개인 관계나 집단 관계가 다를 수 없습니다. 역시 우리 현실에서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제재와 응징이 평화를 이뤘습니까? 인도적 지원과 대화야말로 평화를 이루는 방법 아닙니까? 어떤 방법이 추구될 때 우리의 삶이 더 평화로웠습니까? 니버가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자신의 입장을 펼쳐 결국 현실주의에 빠지고 말았지만, 오늘의 상황을 봤다면 다른 결론에 이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중요한 진실은, ‘그리스도의 평화’는 힘의 우위에 의한 ‘로마의 평화’나 ‘아메리카의 평화’와는 전혀 다른 길, 전혀 다른 방법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상식적 윤리는 자기 또는 자기집단 내지는 공동체 내에서의 마땅한 행위를 추구하는 데 머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화를 따르는 윤리, 그리스도의 윤리는 철저하게 상대의 입장에 서고, 오히려 한 술 더 떠 상대의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자기의 한계를 초월하는 윤리입니다. 그러기에 간단치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 진정으로 이 땅에 정의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는 길이냐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신 것은 현실에 순응하고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수 앞을 내다보고 근본적 방법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로 깨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높은 영적 혜안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한다면, 그 혜안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의 경지에 이르고, 더불어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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