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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밝히는 어린양 - 요한계시록 5:1~5[음성]
 최형묵    | 분류 :   | 2017·12·03 15:23 | HIT : 51 |
2017년 12월 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진실을 밝히는 어린양    
본문: 요한계시록 5:1~5



오늘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를 기리는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 첫 주일 우리는 성서일과를 따라 모처럼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모처럼 요한계시록을 본문말씀으로 한 만큼, 이 책이 성서의 신앙세계에서 갖는 의미부터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온갖 상징과 비의적인 언어들로 기록된 요한계시록은 이른바 전형적인 묵시문학에 해당합니다. 묵시문학이란 비밀스러운 계시를 암묵적으로(상징과 비의를 통해) 드러내주는 문학작품의 한 형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 상징과 비의를 알지 못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묵시문학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묵시문학 독립저작으로 구약성서에는 다니엘서가 있다면 신약성서에서는 요한계시록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구약의 예언서나 신약성서의 복음서, 심지어는 바울의 서신 가운데서도 묵시문학적 성격을 강하게 띤 대목들이 들어 있습니다.
왜 묵시문학이 그런 성격을 띠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렇게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이 투명하게 드러나면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대로 알려지면 그 뜻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엄혹한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묵시문학의 언어는 그 엄혹한 시대와는 타협할 수 없는 정신세계와 삶의 지향을 가진 사람들의 언어였습니다.
그 엄혹한 시대와 타협할 수 없는 정신세계와 삶의 지향의 실체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날 그것을 일러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믿음이 그 요체입니다. 종말론은 철저한 비타협적 세계관이요 근본적 세계의 변혁을 추구하는 혁명론과 같은 것입니다. 성서의 신앙세계 안에서 그 종말론은, 구약성서 시대 후기부터 예수님 당시, 그리고 초기 교회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 동안 아주 중요한 정신적 기조를 형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세계 또한 그것을 빼놓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교리화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깊어지고 있습니다만, 바로 그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는 데도 종말론적 세계관은 중요한 하나의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크게 두 개의 경향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1세기 지중해연안의 농민들의 세계 안에서 이해하는 경향입니다. 그리스-로마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하층 민중에 속하는 예수의 정신세계와 삶의 지향을 조명하려는 경향입니다. 이런 접근에서 드러나는 역사적 예수는 깨달은 현자이자 보편적인 휴머니스트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어쩌면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많은 면모를 닮았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세계는 오늘날 합리적 정신세계와 크게 충돌하지 않고 조화될 수 있는 면모가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조명해서는 해명되지 않은 언행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접근이 유대의 정신사적 맥락에서 역사적 예수를 조명하는 것입니다. 이 때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동시대 세상과 타협을 용인하지 않는 종말론입니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예수님의 말씀, 그리스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독설과 역설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방식,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그 중심 메시지를 삼고 있는 점은 구약성서로부터 이어지는 종말론적 정신세계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면모에 해당합니다.

요컨대 종말론은 철저한 세계의 변혁을 추구하는 혁명적 세계관에 해당하고, 오늘날 다른 가르침과 달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독특성을 지닌 것 또한 상당 부분 이로부터 연유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해를 전제하고 보자면, 요한계시록은 1세기 전후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희망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에 해당합니다. 처절한 박해로 인한 그리스도인들의 수난, 불의에 맞선 순교자적 신앙의 신실함, 그리고 역사의 궁극적 심판자가 되시며 동시에 화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승리에 관한 고백입니다.
오늘 그처럼 처절한 박해의 상황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현실에서 요한계시록은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전하고자 하는 진의가 무엇인지 알고, 더불어 오늘 우리 시대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거나 망상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지닌 두루마리의 봉인을 누가 뗄 수 있는지 밝혀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세계의 현실을 알려주고, 다가올 파국, 그리고 마침내 이어질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 진실이, 아직 봉인이 떼어지기 전에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계시록의 기록자 요한은 하늘의 보좌에 앉아계신 분이 손에 두루마리를 하나 들고 계신 것을 목격합니다.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는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이 찍혀 있습니다. 천사가 외칩니다.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고 펼쳐볼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도 없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요한은 슬피 웁니다. 그 때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말합니다.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이 일곱 봉인을 떼고, 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습니다.” 이 분이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까지 감춰진 세상의 진실을 밝힐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감춰진 진실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진실입니다. 그 진실이 뭘까요? 오늘 본문만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마침내 ‘어린양’이 나타나 그 봉인들을 하나하나 떼어낼 때 그 진실들이 드러났다고 전하는 6장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그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진실들이 감춰져 있었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눈에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6장에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봉인으로 감춰진 진실, 그것은 사람들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현실, 아니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현실, 아니 더 나아가 심지어 축복의 조건에 해당한다고 여기는 세상의 현실들을 뜻합니다.

그 진실들이 과연 뭘까요? 봉인을 하나하나 뗄 때마다 그 진실이 밝혀집니다. 첫째 봉인을 뗄 때, ‘흰말을 탄 사람이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정치적 권력을 상징합니다. 로마제국 황제의 끊임없는 정치적 지배의 욕망, 그에 사로잡힌 세계 현실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계질서입니다.
둘째 봉인을 뗄 때, ‘붉은 말을 탄 사람이 평화를 걷어 버리고 사람들을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군사적 지배를 상징합니다. 군사적 폭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욕, 그에 신음하는 세계 현실을 말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세계현실 아닐까요?
셋째 봉인을 뗄 때, ‘검은 말을 탄 사람이 손에 저울을 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울은 상거래를 상징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로마제국의 경제적 세계 지배를 말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를 보장해 주는 세계질서로 여기는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 경제적 지배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말, 곧 ‘밀 한 되도 하루 품삯이요 보리 석 되도 하루 품삯’이라는 말은 시장을 독과점한 부자들의 재물축적을 뜻하고,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불순하게 하지 말라’는 말은 귀족계층의 향락적 생활과 부의 양극화 현상을 상징합니다.
넷째 봉인을 뗄 때, ‘청황색 말을 탄 사람의 이름은 사망인데, 그를 뒤따르는 지옥의 무리들 곧 칼과 기근과 죽음이 사람들의 사분의 일을 멸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재난과 역병, 곧 오늘 말로 생태계의 교란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이 현상을 두고 불가피한 상황이라 여기며, 이로 인한 희생을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을까요?
다섯째 봉인을 때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또 그들이 말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영혼을 봅니다.’ 넷째 봉인을 뗄 때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현실을 지배하는 죽임의 세력의 실체를 드러내주고 있다면, 다섯째 봉인을 뗄 때 그 죽임의 세력에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실상이 드러납니다. 이 장면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죽임당한 수많은 영혼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신원하여 주기를 간청합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응답은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의 수가 차기까지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쯤 되면 탄식의 소리가 높아지기 마련입니다. 저런! 오늘 세상은 과연 그 탄식의 의미를 알까요?  
그리고 여섯째 봉인을 뗄 때, 임박한 심판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자연현상이 기이한 조짐을 드러내고 죽음의 냄새가 천지를 진동합니다. 심판받는 주인공들이 열거되는데, 왕들과 고관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세도가들입니다. 여기에 또 의미심장한 목록이 있습니다. 그 심판의 대상에 노예와 자유인 또한 포함됩니다. 그것은 불의한 로마제국의 지배에 굴종하고 타협하며 죽임의 권세에 직간접적으로 빌붙어 사는 ‘노예’, 그리고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기들만의 천국을 누리고 있는 자유로운 시민들 또한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까요?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은 완전한 파국에 이릅니다. 7장 이하에 나오는 일곱 번째 봉인을 떼었을 때 장면은 세상의 완전한 파국을 전합니다. 그 파국이 있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고 요한계시록은 전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전하는 내용은 단순히 고대 종교의 어떤 환상, 또는 종교적 열정이 지나친 사람의 무모한 몽상이 아닙니다. 그 내용이 여전히 오늘의 세계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실을 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은 섬뜩한 진실입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감춰져 있는 진실이 어째서 ‘어린양’, 곧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 의서만 밝혀질 수 있을까요?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도 없는데, 어째서 ‘어린양’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
6장 9절 이하의 말씀은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 제사장이 되게 하셔서, 땅 위에서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오로지 사랑을 펼치신 그 삶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진실이 환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삶의 의미를 깨우친 사람들 또한 그 진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 말씀의 요체가 무엇일까요? 사랑을 주고받고, 나누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중심에 두면 모든 진실이 환히 드러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삶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세상의 현실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입니다. 사람들이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축복의 조건으로 여기는 것들이 실상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와 몸소 인간의 몸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사랑의 삶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모든 진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 진실이 드러나는 방식은 다르지 않습니다. 과연 무엇이 옳을까요? 응징을 해야 할까요, 대화를 해야 할까요? 국가안보가 우선일까요, 국민안보가 우선일까요? 사람이 우선일까요, 어떤 효율이 우선일까요? 무엇이 옳은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생각될 때,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보장해주는지 아닌지를 판별하면 됩니다. ‘일부 희생이 따르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기만입니다. 자연의 이치 가운데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두고는 불가피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인간이 만든 제도, 인간 스스로가 형성한 관계를 두고는 함부로 불가피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특정한 인간들만을 위하여 대다수 인간들을 노예로 묶어두려는 기만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불가피한 희생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 성서의 근본적 관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모든 족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시고 참 인간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진실을 믿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대림절 첫 주일, 오늘 우리가 그 믿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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