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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구원의 무거움 - 로마서 3:21~26; 9:5 [정용택 목사 / 음성]
 살림교회  | 분류 :   | 2017·12·10 14:01 | HIT : 777 |


2017년 12월 1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참을 수 없는 구원의 무거움
정용택 목사

본문: 로마서 3장 21~26절; 9장 5절

3: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πίστ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25    하나님께서 예수의 신실하심(πίστεως)을 통하여 예수의 피로써 예수를 속죄제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26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의 신실하심(πίστεως Ἰησοῦ)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일부 수정)

9:5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면서,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표준새번역)


1. 하나님 예수

지난 주 토요일 청년회 송년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청년들이 받았던 인상, 이후에 교회를 계속 나오면서 달라진 생각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특히 설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었는데요. 어떤 분은 우리 교회의 설교가 뭔가 가슴을 후벼 파는 부분이 많아서 힘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그런 부분이 좋아졌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처음에는 기존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감성을 자극하고 영혼을 위로해주는 측면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위로를 많이 받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서로 모순적인 부분일 수도 있는 후벼 파는 측면과 위로해주는 측면, 제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신앙의 윤리적·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측면과 궁극적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하심을 확신하는 측면이 공존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로마서를 중심으로 하여 우리의 구원이 어디서, 누구로부터 오며, 또한 무엇을 향하고 있고, 어떻게 지금 여기에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통해서 그 두 측면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에는 2000년 그리스도교 신학사에서 해석상의 논란이 분분한 여러 본문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7장 7-25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가 있습니다. 이에 관해선 예전에 이미 제가 설교를 통해 한 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아울러 로마서 14-15장에서 갈등이 암시되고 있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정확히 어떤 이들을 가리키는가에 관해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에 관해선 나중에 따로 기회가 되면 자세히 소개해드리기로 하고요.

현대 신약성서학계의 바울 연구 분야에선 매우 간단한 하나의 어구를 둘러싸고 문법적, 신학적 논쟁이 수 십 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3장 21-26절, 특히 22절입니다. 물론 오늘 제가 이 본문과 묶어서 같이 말씀드리려 하는 9장 5절 역시 해석상의 논란이 분분한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9장 5절에 대해 설명하고 가겠습니다. 오늘 성경말씀 봉독할 때 표준새번역 개정판으로 읽어주셨는데요. 다시 한 번 확인하자면,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면서,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혹시 공동번역이나 공동번역 개정판 성서를 갖고 계신 분 있나요? 현재 한국교회에서 사용 중인 성경 가운데 이 본문에 관해선 크게 두 가지 다른 번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선 개역개정이나 표준새번역처럼 개신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성경들은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쓰든 아니면 두 문장으로 나누든 공통적으로 후반부에 나오는 만물 위에 계셔서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을 전반부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추진한 교회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함께 번역했지만, 직역보다 의역에 초점을 맞춘 탓에 개신교 측으로부터는 외면당해 그동안 가톨릭에서만 주로 사용해온 공동번역이나 공동번역 개정판은 이 구절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상반절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로, 하반절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출간된 200주년 신약성서에서는 개신교 성서를 따라서 번역이 수정되긴 했습니다. 어쨌든 현재 한국교회에서 통용되는 성경들 가운데서 우리는 이 본문에 관한 두 가지 상이한 번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번역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문제는 간단합니다. 5절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는 삼중적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인가입니다. 그것을 결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원래 이 구절이 필사된 고대의 사본들에는 구두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구두점이란 것이 없으므로 우리가 찍어야 되는 것입니다. 초기의 헬라 교부들 이래로 주류를 점해온 전통적인 견해는 세 표현, 즉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영어권 성경들에서도 대체로 이러한 번역이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RSV나 NEB 같은 성경들에선, 그리고 우리말 공동번역에선 그리스도에서 구두점을 찍고, 그 뒤에 나오는 모든 표현들은 독립적인 문장이 되도록 처리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와 하나님의 동일시를 부정하는 번역인 것이지요. 양자의 절충적인 번역으로서 ‘만물 위에 계셔’라는 말은 그리스도께 적용하지만, 나머지 두 표현은 하나님 아버지께 적용하는 번역도 있긴 합니다. 여러분들이라면 어떤 번역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 다시 묻지요. 이스라엘 민족의 후손, 즉 유대인이었던 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라고 여러분들은 믿으십니까?

우리의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보자면,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어야 할 본문인데, 왜 해석상에 상이한 번역이 존재할까요? 바울은 확실히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계신 주권자로 봤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부른 다른 사례가 있냐는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바울은 이 구절 외에 모든 자신의 서신에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를 구별했습니다. 예수에게 ‘주’라는 신적 칭호를 부여하고 있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하나님이라 부른 사례는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로마서의 전후 문맥이나 구조에서 이러한 표현, 즉 예수를 갑작스럽게 하나님이라 부르는 고백이 자연스러운가를 따져 봤을 때도 그렇고, 예수를 하나님이라 부르진 않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욱 의미심장하게 ‘하나님의 본체’이며 ‘하나님과 동등’되다고 묘사했던 빌립보서 2장 6절의 케노시스 그리스도론을 염두에 둘 때도 이 구절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말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어쩌면, 바울이 그동안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되도록 자제해오다가 일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흥분하여 계시의 비밀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바울이 ‘아멘!’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도 그런 흥분과 감격의 표현이 아닐까요? 아멘? 일단 그 본문에 관해선 여기까지만 설명하고, 오늘의 중심 본문인 3장 21-26절로 가보겠습니다.


2.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3장 21-26절이 논쟁이 되는 까닭은 바로 22절에 나오는 ‘피스티스 크리스투’(π́ιστις Χριστου̑)라는 어구 때문입니다. 피스티스는 보통 믿음, 충성, 충실함, 신실함 등으로 번역되는 명사이고, 크리스투는 크리스토스(Χριστος), 즉 그리스도의 소유격 형태입니다. 문제는 이 두 개의 명사를 조합했을 때 문법적으로나 성서 용례상으로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피스티스 크리스투에서 피스티스라는 명사는 뒤에 붙은 ‘크리스투’라는 명사에 종속되어 있는데, 피스티스에 대한 크리스투의 지배 관계를 주격적으로 보느냐 목적격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격적으로 번역하면 피스티스 크리스투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되고 목적격적으로 번역하면 ‘그리스도를 믿음’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이나 ‘그리스도를 믿음’이나 그냥 조사 하나 차이인데,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싶으시지요? 중요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피스티스 크리스투를 우리의 구원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515년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이 구절의 피스티스 크리스투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번역한 이래로 지난 500년 동안 종교개혁적 전통을 따르는 모든 신약학자들이 피스티스 크리스투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번역하는 데 무비판적으로 지지해왔고(현대에는 대표적으로 제임스 던이 이 해석의 강력한 옹호자입니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저명한 학자들만이 바울에 대한 종교개혁적 해석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면서, 나아가 바울신학의 근본적인 강조점을 새롭게 파악하게 되면서 그동안 초기 교부들 이래로 교회사에서 오랫동안 망각되어온 번역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습니다(리처드 B. 헤이스, N. T. 라이트; 박익수, 최흥식, 서동수 등). 로마서 9:5와 달리 이 어구에 관한 한 개역한글판부터 200주년 기념성서까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한글 성경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저는 그런 번역을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1980년대부터 현대 바울신학에서는 피스티스 크리스투를 둘러싸고 ‘그리스도를 믿음’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냐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러한 논쟁을 난외주에라도 언급하고 있는 한글 성경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매우 유감스럽게 여깁니다. 심지어 목회자들조차도 이러한 신약학계의 동향을 접해보지 못한 까닭에 교인들에게 다른 번역의 가능성 및 그에 따르는 새로운 신학적 해석의 지평을 소개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피스티스라는 명사는 원래 “~를 믿다” 또는 “~를 신뢰하다”라는 타동사 피스테오에서 파생되었고, 이것이 명사구로 사용될 때는 별도의 전치사구를 동반하여 그것이 다른 대상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3장 22절도 그렇고, 피스티스 크리스투라는 어구가 사용된 바울의 다른 본문들, 예컨대 갈라디아서 2장 16절과 20절, 3장 22절, 그리고 빌립보서 3장 9절에선 별도의 명사구 없이 크리스투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번역할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번역할 것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참고로, 피스티스 크리스투와 문법적으로 동일한 어구가 바로 로마서 3장 21절에 나오는 ‘디카이오쉬네 테우’(δικαιοσνη θεου̑), 즉 ‘하나님의 의(義)’라는 표현인데, 이 때 ‘의(義)’라는 명사로 번역된 디카이오쉬네는 원래 ‘~을 의롭게 하다’ 또는 ‘~을 의롭다 칭하다(여기다)’라는 동사 ‘디카이오오’(δικαιοω)에서 파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테우’(θεος), 즉 하나님과 결합해서 사용할 때 디카이오쉬네 테우가 되며, 이때 디카이오쉬네가 종속되는 테우는 ‘하나님을’이 아니라 ‘하나님의’로 번역되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주체인 하나님을 다른 누군가가 의롭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피스티스 크리스투 역시 그리스도를 믿는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으로, 즉 그리스도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신실하심의 주체적 소유자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문법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차원입니다.  

롬 3:22를 전통적인 방식,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더 정확히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해석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혹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번역하면, 일단 문체적으로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피스티스 크리스투에 바로 이어서 나타나는 어구인 “믿는 모든 자를 위하여”가 불필요한 반복적 표현이 되고 마니까요. 따라서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모든 믿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라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그러나 단순히 문체상의 문제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특히 구원론 및 그리스도론 관련하여 이 문제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전통적인 번역을 따르게 되면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믿음’이라고 하는 의식적 작용에서 비롯된, 그래서 인간 외부의 초월적이고 객관적인 하나님의 은총에 입각한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라, 행위의 대안으로 추정되는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업적이나 기여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믿음’이라는 ‘수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번역하게 되면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의식적·내면적 차원의 활동을 통해 가능하다는 논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전반에 나타난 바울의 칭의론의 전체적인 의미와도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후자를 따를 경우 우리가 믿건 말건 혹은 예수를 알건 모르건 관계없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때 피스티스는 행위와 구별되는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를 포괄하는 삶 전체로 드러나는 총체적인 ‘신실하심’, 또는 알랭 바디우의 개념대로 “(진리사건에 대한) 끝없는 탐색의 연속을 지탱하는 데 요구되는 덕성”으로서의 ‘충실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함―에 근거하여 모든 인류를 이미 의롭게 하신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지, 개인의 주관적인 믿음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이미 우리는 모두 존재론적으로, 즉 우리 개개인의 실제적인 성품이나 예수에 대한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의로운 신분을 획득하게 됩니다. 실제로 죄를 범한 인간이 그 내면이나 성품이 전혀 의롭게 변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판사가 무죄를 선고하는 순간 법적으로 의인의 신분을 획득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컨대, 로마서 3장 21-26절에 따르면, ‘칭의’라 불리는 구원사건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건 안 믿건 간에 관계없이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드러났으며(완료시제 πεφανέρωται),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더 이상 이 세계 전체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의롭게 하신 사건이 ‘돌이킬 수 없게’ 구조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그저 그러한 은혜로운 구원사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키는 텅 빈 기표일 뿐, 의식적이거나 내면적인 차원의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과연 무엇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 메시아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은 구속의 죽음,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를 반역한 죄를 도말하고 처리하는 죽음이며, 죄인이 ‘옳다고’ 인정받고(義認), 재판관에 의해 법적으로 의로운 신분을 얻은 것으로 선언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그런 죽음입니다. 죄인들 자신에게 있는 어떤 도덕적인 자질이나 종교적 기여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수행하도록 부름 받았지만 그들의 죄로 인해 끝내 실패했던 그 일을 죄 없는 메시아 예수가 완수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이방인들까지 모두 의롭다 칭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稱義). 또한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3장 21-26절이 시사하는 바는, 예수라 불리는 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나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최초의 기독교 신자, 즉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선구자로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다는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겨우 예수 한 사람의 신실함 때문에 모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요? 그 답은 앞서 로마서 9장 5절을 통해 이미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법정을 무대로 한 이 구원의 드라마에서는 피의자로 기소된 인간을 제외하고 검사, 변호사, 판사, 피해자, 나아가 가해자를 대신하여 처벌받는 대리인까지 모두가 동일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재판이 끝날 때까지도 인간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에게 배신당했던, 그래서 율법을 통해 인간을 죄인으로 끊임없이 고발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계속해서 변호했던, 마침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처벌을 내린 재판관 자신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 외에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만족될 수 없기 때문에, 그분 자신이 죽음으로써만 피조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피조물이 그러하듯이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죽음을 피하기보다 그것을 넘어서셨고, 결국 부활하셔서 이제는 성령으로 우리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은 완전히 죽었던 하나님의 부활이자,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신성이 현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이러한 측면을 존재론적이고 객관적이며 본질적인 차원의 구원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존재론적 구원은 피조세계의 보편적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하는 로마서 11장 36절의 종말론적인 구원론과도 상통합니다. 11장 36절은 고린도전서 8장 6절이나 골로새서 1장 15-20절과 유사하게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지만, 여기선 특히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종말론적 보편 구원사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합니다. 이 ‘만물’(πάντα)이 과연 ‘믿는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탄, 악, 죄, 부정의, 지옥, 악인마저도 포함하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어느 신약학자의 해석에 따르면, 이 구절은 “의심할 여지없이 창조론과 현재적 구원행위로 볼 수 있는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보존과 통치사상 그리고 전체 피조물에 대한 추호의 상실도 염두에 두지 않는 총체적 종말론적 구원사상의 결합으로 밝혀진다”고 합니다. 바울에게 “역사의 종말은 태초의 과거사와 현재의 진행을 포괄하는 초시간적 구원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로마서 3장 22절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 특히 종말론적 차원에서 그 최종적인 확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본문으로서, “구원은 종교개혁 사상이 말하는 바 개인의 신앙의 결단으로 결정되는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 전체의 문제로 파악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제 아무리 악인이고 사탄이고 간에 결국엔 그들마저도 구원하시고야 말 하나님의 신실하심, 그 무한한 사랑과 절대적인 은총의 승리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출발점과 종착점 모두에 인간의 이성으론 이해 불가능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이보다 더 강력한 위로와 소망의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적어도 저에게는 이보다 더 큰 진리는 없고 제 삶을 추동하는 동기도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이 놀라운 구원사건 대하여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적절한 반응양식이 곧 목회자/신학자로서의 삶이라 생각했기에 기꺼이 그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고 계십니까?


3. 실존적 구원과 현실적 구원의 커다란 간극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가 이미 구원을 받았고, 또한 종말론적 차원에서 결국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갈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의 실제적인 감정과 의식과 구체적 경험으로 이루어진 매일 매일의 실존은 이러한 구원사건을 믿는가 안 믿는가에 따라서 현저하게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구원의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義)를 믿고 안 믿고는 우리의 삶에 커다란 차이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와 종말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으면서, 즉 실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실존적으로 거대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진, 그리고 궁극적으로 만물을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하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생각하면 언제나 감동적이고 행복하지 않습니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 험난한 세상에서 예수를 따르는 삶이 아무리 손해가 막심하고 억울할 때가 많을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자녀의 삶이라 믿기에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다양한 현장들에서 분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렇듯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울의 관점에서도 그 둘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신실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객관적이고 법정적인 구원과 종말에 완성될 만유의 보편적 구원에 관한 이야기, 즉 복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실존적으로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동시에 예수가 돌아올 때까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바울은 봤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상과 현실은 다르지 않습니까? 예수에 대한 구원의 감격, 복음에 대한 실존적인 체험은 순간의 것일 뿐 지속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성화된 삶을 향한 실천적 의지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무수히도 많은 교회 안의 인간 군상들이 입증해왔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을 볼 것도 없이, 우리들 자신부터 그 괴리를 날마다 자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전에 로마서 7장의 본문을 가지고 말씀드렸듯이, 제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이 육신과 사망의 세상에 속한 일부라는 것이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1년 365일 내내 교회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닌 이상, 구원에 대한 실존적인 감격이 삶의 모든 행위로 이어지긴 어렵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가 보유한 자산과 권력을 비민주적으로 세습하는 일부 교회의 행태에서 보듯이, 교회 안에서조차도 얼마나 많은 범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義)에 감격하면서 실존적인 구원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는 이들이 정작 그 실제적인 삶에 있어선 예수의 제자와는 전혀 무관한 비윤리적이고 반동적이며 심지어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하게 표출하고, 사회의 부정의가 공고화되는 데 헌신적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본회퍼가 값싼 은혜라 부른 것, 예수의 행적을 따르는 제자도의 삶과 분리되어, 그저 죄의 손쉬운 탕감을 위한, 아니 더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구원의 알리바이가 되어버린 저 실존적 차원의 구원을 누리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과 바울이 성화의 증거로 제시했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괴리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의 신실하심을 알기는커녕 신의 존재조차도 믿지 않는 이들이 오히려 예수의 제자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제 주변에는 온통 그런 좌파 친구들, 활동가들뿐이기에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고민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에 대한 의식적인 신앙을 통해 반복적으로 체험되는 실존적 구원, 즉 순간적이고 의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측면과는 다른 구원의 측면이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원래는 이 두 측면의 구원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분리되지 않고 조화롭게 일치되어 나타나는 것이 정상이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두 측면을 구별해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다 못해 그에 대해서 전혀 관심 없고 심지어는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보다도 훨씬 더 예수를 닮은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교회 밖의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이 의도하지 않게 이루어가고 있는 구원의 측면을 실존적인 차원의 구원과 구별하여 ‘실제적’ 또는 ‘현실적’ 구원이라 부르고자 합니다. 어쩌면 제가 그동안 수행했던 사회비평의 많은 부분은 그렇게 교회 바깥에서 교회 안의 신자들과는 다른 종류의 구원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신학적으로 의미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구원의 감격에 대한 순간적인 체험만 반복할 뿐 예수의 제자로서 현실적인 구원을 삶 속에서 이루어가지 못하고 있는 이들보다는 복음을 전혀 모르더라도 그리스도인들보다도 훨씬 더 예수의 삶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이들에게 저는 더 관심을 가져왔던 것 같습니다.

일찍이 민중신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분인 죽재 서남동 목사님은 「성령의 제3시대」라는 매우 중요한 글에서 기독교의 지배력이 상실된 오늘날의 시대를 성부와 성자의 시대 이후에 도래하는 성령의 제3시대 안으로 포함시키면서, 바로 그러한 시대에 성령은 교회라 불리는 제도화된 기성의 신자공동체 속에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변혁적인 민중운동 및 대안적인 공동체들 속에 현존하고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나아가, 서남동은 이러한 성령의 제3시대에 하나님은 더 이상 실존적인 구원에만 함몰되어 있는 기성교회의 신자들을 통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서 메시아적 혁명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이들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들을 ‘민중’이라 명명하며 자신의 신학은 바로 그러한 민중의 현장 속에서 성령의 현존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4. 구원, 그 모순적인 총체성

결국 구원은 네 차원의 상반된 측면이 모자이크처럼 얽혀 있는 어떤 모순적인 총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네 차원의 구원을 각각 이렇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존재론적 차원의 구원: 로마서 3장 21-26절. 우리가 예수를 믿냐 안 믿냐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실행된 객관적이고 법정적인 차원의 구원(이른바 ‘칭의’(稱義) 혹은 ‘의인’(義認)이라 불리는 개념).  
2) 실존적 차원의 구원: 로마서 10장 9-10절[“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흔히 믿음생활이라 불리며,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기독교 신자의 일반적인 삶. 복음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한 믿음으로 반응함으로써 구원을 순간순간 체험하는 측면.
3) 현실적 구원: 빌립보서 2장 5-12절[“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예수의 삶을 따르는, 혹은 의식적으로 안 따르더라도 그 궁극적인 지향점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 해방을 실천해나가는 삶의 긴 과정. 전통적으로는 ‘성화’(聖化)라 불리는, 그러나 현대의 진보적 신학 전통에서는 개인윤리 차원을 넘어 사회적·정치적 책임을 포괄하는 실천(praxis)적 신앙에 해당하는 것.  
4) 종말론적 구원: 로마서 11장 36절. 만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의 시간성.

문제는 2)와 3)의 아포리아적 관계입니다. 바울에게는 이게 분리가 안 되는 것들이었겠지만, 우리는 분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3번의 구원, 즉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본격적으로 추구하면 할수록 2번의 실존적 구원의 체험은 날마다 점점 희미해져갈 때도 많습니다. 송년 모임에서 청년들이 고백했듯이, 그동안 우리 교회를 다니면서 새롭게 배우게 된 진보적이고 참여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과거에 보수적인 교회를 다닐 때 누렸던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구원의 감격이나 평안, 또는 물질적인 부와 권력, 명예를 얻는 것과 곧바로 동일시되던 축복받은 신자의 삶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것이니까요.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서는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안 행복할 수도 있다는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나의 성공한 삶을 위한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 즉 내 삶을 끊임없이 후벼파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민중신학에선 그것이 구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러분, 결코 낙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그래봐야 우리의 구원의 출발점은 1번의 존재론적 구원이고, 결론은 4번의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점에서, 어쨌거나 구원은 이미 그리고 앞으로도 확실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를 하나님은 이미 의롭게 하셨고,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만물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끝내 되돌아오게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원을 ‘지금시간’의 관점에서 바로 오늘 여기에서 현실화시키는 문제가 여전히 계속 남아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 1번과 4번, 즉 존재론적 구원과 종말론적 구원은 직선적인 시간의 관점에서 처음과 끝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예컨대, 드니 빌뇌브의 영화 <컨택트>(Arrival)에 나오는 헵타포드(heptapod)의 시간관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둘은 원환적 관계를 이룰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선 1번과 4번의 구원이 각기 병렬적으로 놓여 있었던 그 직선적인 시간대를 하나님은 지금 당장이라도 구부려서 그 둘을 순식간에 이어 붙여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구원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도래할 수 있다고 성서는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시간의 구부러짐, 또는 시간의 수축을 가리켜 ‘카이로스’(καιρος)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1번의 구원과 4번의 구원이 서로 갑작스럽게 대면하게 되는 카이로스적 시간의 도래는 2번과 3번을 어떻게 종합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의(義)에서 위로와 소망의 궁극적 근거를 찾으면서 실존적인 구원의 감격을 항상 누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삶의 여정 가운데 정의와 평화, 해방을 위한 예수의 길을 올곧게 따르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현실적인 구원을 이루어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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