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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조건 - 로마서 15:1~13[음성]
 최형묵    | 분류 :   | 2017·12·17 15:24 | HIT : 583 |
2017년 12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약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조건  
본문: 로마서 15:1~13



오늘 우리는 로마서 15장의 제법 긴 본문을 함께 읽었습니다만, 그 말씀의 요체를 말하자면 그다지 복잡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는 사실상 전반부인 15장 1~6절에 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한 마음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본문말씀의 요체는 믿음이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집약됩니다. 그런데 그 표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함으로써 그 의미를 신앙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7절 이하의 말씀은 그 교훈을 다시 반복하며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중간에 등장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깊이 생각해야 할 내용을 함축하고 있지만, 우선 본문말씀의 전반적 취지에서 그 의미를 새기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인방인에게도, 다시 말해 세상 만민에게 진정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1~13절까지 말씀을 집약해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며, 그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훈을 단순히 하나의 일반적인 원칙으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 말하고 있습니다. 1절 첫머리의 말씀이 그 실마리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누구고, 믿음이 약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14장에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담겨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먹는 것을 가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내가 무엇을 먹든지 그것은 내 믿음과는 상관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편지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편지라는 것을 전제하고 볼 것 같으면, 아마도 믿음 때문에 먹는 것을 가리는 사람은 율법에 따라 허용된 것과 허용되지 않은 것을 가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 것으로 보이며, 믿음은 먹는 것과 상관없다는 사람은 그 율법의 금기를 더 이상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로마교회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보다 소수를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약한 사람은 율법의 금기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조심스러운 믿음의 소유자들이자 동시에 수적으로 소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율법의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며 수적으로도 다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다수의 편에 있는 것으로 여기며, 다수의 강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배려하고 돌보아 줄 때 온전한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물론 바울은 비단 이 둘의 관계만을 유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둘이 아니라, 셋이든 넷이든, 서로 다른 처지에 있고 서로 다른 믿음의 정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있다면 마땅히 서로가 서로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믿음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배려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일관된 관점이요, 성서의 일관된 관점입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통해 모두에게 공평한 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일관된 교훈입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바울은 율법의 굴레를 벗어던진 사람입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그 어떤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삶의 실존적 조건을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굴레가 율법일 수도, 신분이거나 출신 또는 어떤 사회적 지위일 수도, 경제적 소유 여부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본을 보여 준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믿음을 자랑하고 그 믿음 때문에 자유를 누린다고 자족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된다고, 바울은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7절 이하에 나오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관한 언급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그 큰 뜻만 우선 확인하고 지났습니다만, 이 대목에서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볼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은 이 언급을 통해 또 하나 중요한 진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었으나 마침내 하나님의 진실을 드러냈다’는 이야기,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방 사람을 다스릴 이가 일어날 것’이라는 이야기가 함축하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말하면 예수께서 유대인의 후예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만, 지금 사도 바울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고 배려하라고 말하고 있는 맥락에서 볼 것 같으면 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미덕을 뜻합니다. 율법의 굴레에 매여 있던 그 사람들 가운데서 그 굴레를 파기하고 모든 사람에게 그 굴레에서 벗어난 구원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그 약한 사람들 가운데서 보편적 구원의 빛이 나타나게 된 진실을 말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 이 유대인들은 여전히 옛 굴레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에 공동체 안에서 약한 사람들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배척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오히려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 굴레를 벗고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삶의 기쁨을 누리는 희망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문자기록으로서 성서를 대하면서 그 옛 문헌의 맥락을 잘 몰라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실 자체가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어렵지 않은 진실을 깨우쳤는데도 그것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 진실을 가로막는 우리의 삶의 현실 때문이고, 그 현실에 매여 있는 우리의 삶 때문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함으로써 그 삶의 정황을 깊이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한 자의 삶의 상황을 헤아리고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약한 자를 먼저 배려하고 도와주라고 강조합니다.
그 당연한 진실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 움직이면 그 공동체는 건강합니다. 그 당연한 진실이 살아 움직이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건강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그 당연한 진실을 퍼뜨리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전파입니다.

물론 현실적 난관이 존재합니다. 재차 확인하지만, 사도 바울도 그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최근 두 가지 사례 가운데서 그 현실적 난관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른바 성적 소수자를 대하는 우리의 시선 내지는 의식 가운데 자리한 난관입니다. 말도 안 되는 차별과 혐오의 주장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포용적 입장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경우에도 난관은 존재합니다.
저는 최근 한국 교회 공적인 차원에서 그에 대한 논의가 막혀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공론화하여야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관련 태스크포스팀(TFT)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현상을 어찌 이해하여야 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하나하나 점검하기 위한 논의 과정입니다. 2주전 당사자들과 관련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퍼뜩 드는 생각이 있어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적 소수자를 정말로 포용하려면 교회 안에 남신도회ㆍ여신도회 조직도 곤란하겠군요!” “맞습니다!”
한 참 전에 우리 교회에서는 무지개 표시를 하면 어떻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정말 충분한 준비와 합의가 필요하기에 숙제로 삼자고 잠정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번의 그 대화 시간은, 소수자를 포용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새삼 깨닫게 된 계기였습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을 환영하는 표시를 해놓고도 편의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녹색교회 표지판은 그 지향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괜찮을 수 있을지 몰라도, 구체적인 인격적 대상을 맞아들이는 데는 맞아들이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데서 드러나고 있는 난관입니다. 지금 정부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정규직화 정책이 다른 게 아니라 정규직 직원들의 반발로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지금 인천공항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차별을 없애자는 데 왜 반대할까요? 공정한 채용의 절차상 역차별이라는 것입니다. 몇 십대일 또는 기백대 일의 경쟁 시험을 통과하여 정규직이 된 사람의 입장에서 얼렁뚝딱 정규직화되는 경우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히 일리가 있습니다. 특히 그 공정성의 기준이 무너졌을 때 온갖 비리가 벌어지는 우리 사회 현실에서 그 이의제기는 쉽게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문제는 공정성의 기준이, 정말로 업무능력과 얼마나 상관이 있는지도 불분명한 시험 하나로 한정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가치기준이 문제일 것입니다. 공정성의 기준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 다양하게 확립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회적 합의의 비용을 지금까지 치르지 않고, 그저 개인에게 떠맡겨 경쟁의 법칙에서 살아남도록 해온 우리 사회가 지금 치르고 있는 진통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긴 이야기할 겨를이 없기에 방향만 암시합니다. 현대 정의론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존 롤스는 정의를 이루기 위한 공정한 절차와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였습니다. 공정성으로서 정의라고 할 만큼, 그의 정의론은 절차의 공정성과 기회의 평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원칙을 말합니다. 불평등이 용인되는 조건을 밝힌 것입니다. 약자를 보강하는 데서는 차등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이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요? 바로 성서의 정신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뜻이 뒷받침해 주는 원칙입니다.

인간사회가 얼마나 살만한 사회가 되고, 얼마나 성숙해지느냐 하는 것은 그 진실을 깨닫고 구현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임하시기를 기원하는 대림절 셋째 주일,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여 주신 그 삶의 진실을 마음 깊이 새길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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