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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신 하나님의 뜻 - 고린도전서 1:26~31[음성]
 최형묵    | 분류 :   | 2018·01·07 15:26 | HIT : 55 |
2018년 1월 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신 하나님의 뜻
본문: 고린도전서 1:26~31



새해 첫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동시에 오늘은 천안살림교회 창립 18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새해 첫 주일은 새해 새로운 삶의 자세를 새롭게 하는 때인데다가, 우리로서는 교회공동체의 새로운 시간을 예비하며 각오를 새롭게 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이 때, 우리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성서일과를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한 특별히 진정한 교회공동체의 존재근거와 존재방식을 일깨워 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주는 말씀이지만, 고린도교회뿐만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여러 교회에 공통되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상당수는 그렇게 사회적으로 미약한 사람들이 중심을 이뤘습니다. 물론 점차적으로 교회 안에는 다양한 계층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사도 바울 시대에도 이미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도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고린도교회의 경우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누린 회당장 그리스보와 같은 사람도 있었고(사도 18:8), 그 도시의 재무관 에라스토 같은 사람도 있기는 했습니다(로마 16:23). 하지만 초기 교회 구성원의 대다수는 사회적으로 유력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이었던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7:21).
특별히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의 성격을 살펴보면 교회 구성원의 상황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전통적인 교역도시로서 고린도는 매우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얽혀 사는 도시로서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중반 로마에 대항한 그리스세력의 저항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고린도는 로마에 의해 잔혹하게 파괴되어 거의 한 세기 가까이 폐허로 남아 있다가 기원전 44년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재건된 고린도는 전적으로 로마식 도시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전통적 질서가 완전히 해체된 고린도는 뿌리 뽑힌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기에 더욱 적합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퇴역군인, 상인, 도망노예 및 해방노예(법적으로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으나 소유주가 없는 노예 등을 다수 포함) 등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평화스러운 코스모폴리탄의 도시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에는 매일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겉으로는 번성하고 화려했을지 모르지만, 부유한 이들이 상업적 이익에 몰두할 때 그들을 떠받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신산한 삶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처음 구성원은 그 밑바닥 사람들이 중심을 이뤘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는 그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어떤 면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 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여러 가르침이 들어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 공동체 구성원의 공통기반이자 동시에 원점에 대해 환기한데, 이어 그것이 갖는 중대한 의미를 덧붙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에서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보잘 것 없는 백성을 선택하시고 약속의 상대로 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가장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선포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도 사회적으로 유력하지 않은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공동체는 각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유력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실제적 상황을 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와 같은 조건이 진정으로 구원의 사건에 동참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요체라는 것을 말합니다. 결여된 존재들로서 완전한 구원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신학적 통찰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여를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조건이라고 선포합니다. 스스로의 결여를 통해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결국 나아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세상 어떤 것도 자족적인 것은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결여를 채워주고, 서로가 서로를 떠받쳐 주며 살아가는 것이 생명의 이치입니다.
그것은 또한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현존하는 사회적 구조나 질서 또는 제도와는 구별되는 것을 말합니다. 현실로 존재하는 그 질서는 결여를 참지 못합니다. 그 질서는 누구에게든 뭔가 자격을 갖추어야만 한 자리를 내어 줍니다. 그 질서 안에서 결여된 존재는 아예 배제의 대상이 되거나 기껏해야 동정의 대상, 시혜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그 질서 안에서 결여된 존재는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오히려 그 결여를 진정한 공동체의 존립여건으로 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기에 겸손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그 자체로 또한 결여를 스스로의 존재근거로 삼습니다. 결여된 존재, 결여된 구석이 있기에 서로 마음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공동체성이 형성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진실을 더욱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롭게 하여 주심과 거룩하게 하여 주심과 구속하여 주심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대로,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자랑하라고 말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의미를 역설합니다. 그리스도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지혜가 되며, 의가 되며, 거룩함이 되며, 구원이 됩니다. 여기에 열거된 것들은 구원의 특별한 의미를 구성합니다.
그리스도가 지혜가 된다는 것은, 앞에 나와 있듯이 유대인이 추구하는 표적과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와는 명백히 구별되는 어떤 도를 재삼 환기시킵니다. 그런 것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났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그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데 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 스스로의 업적에 의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인정받는 것을 뜻합니다. ‘비천한 것’, ‘멸시받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을 하나님이 선택하였다는 것을 재삼 환기한 것입니다. 인간사회의 법칙은 업적에 의해 인정을 받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바울에게서는 주로 도덕적인 정화를 의미합니다. 의롭다 인정받고 나아가 윤리적 주체로서 당당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역시 스스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삶 자체가 거룩하게 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인간적 의지를 배제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룩하게 되는 가능성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길 안에 있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이 된다는 것은, 궁극적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앞서 말한 것들이 갖는 의미를 종합하는 의의를 지닙니다. 그 모든 것이 성취될 때 그것을 일러 구원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은 주술적이거나 제의적인 차원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의 요체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야말로 궁극적 구원에 이르게 하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비우는 것이야말로 채우는 것이라는 진실, 한계를 인식해야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진실, 내 것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것을 공유하며 풍요로움을 누리는 진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지니는 역설, 인간과 세상을 바꾸는 가장 급진적인 지혜를, 본문말씀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적인 삶의 질서는 그 지혜를 싫어합니다. 뭔가 내세울 것이 있어야 그 존재가치가 인정됩니다. 어쩌면 인간이 현실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가 갖춘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은 불가피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것을 끊임없이 상대화하며 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나만의 성취가 아니라는 진실을 일깨워 주며, 그럼으로써 상대를, 타인을 받아들이며,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긴 이야기는 아니지만, 18년을 꽉 채운 우리 교회가 누리고 있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이 단지 우리의 성취로 자랑하기보다는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저마다의 정성이 얽히고설켜 이뤄졌다는 것을 새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기도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거듭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진실을 깨우치고 있고, 그 진실을 깨우친 마음 바탕을 지켜나갈 수 있다면, 이 교회는 바른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저마다의 삶 또한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나아가 다가올 시간들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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