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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진정성 - 고린도전서 2:1~10[음성]
 최형묵    | 분류 :   | 2018·01·14 14:18 | HIT : 114 |
2018년 1월 1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말씀의 진정성
본문: 고린도전서 2:1~10



지난 주일에도 우리는 고린도전서의 본문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고린도전서의 본문말씀, 게다가 지난 주일 본문말씀에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일 말씀의 요체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함축된 뜻이 그 요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드러낼 것 없는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 하나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스스로를 깨달아야 진정한 구원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역설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으로서, 일관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와 일관된 입장에서 자신이 고린도교회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환기합니다. 하나님의 증거 또는 신비를 전하는 것이 핵심으로, 그것을 포장하는 현란한 말이나 세상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설득을 위한 일체의 수사학을 배제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하고자 하는 핵심으로서 하나님의 신비 내지는 증거 그 자체를 전하려고 애썼다는 것을 뜻합니다.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앞섰다는 것을 뜻합니다.
범람하는 빈말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거꾸로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진정성을 오히려 더 잘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흔히 ‘영혼 없는 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말로 공표하고 규정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진실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예컨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합의가 암만 ‘불가역적 최종적’이라 규정해도, 그것이 진실에 닿아 있지 않고 진정성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말일 뿐입니다. 말로써 강조하면 할수록 실제는 그와는 상반된다는 것을 확인해 줄 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며칠 전 야당의 원내 대표는 빈말의 실상을 노골적으로 시인했습니다. ‘공약을 다 지키면 나라가 망한다’고 말이지요. 스스로, 자기 당이 끊임없이 빈말을 해왔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여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 따위 빈말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지금 이 대목에서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현란한 그 어떤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을 전하고자 하였을까요?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분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는 결의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어찌 다른 지혜가 없었을까요? 그 모든 지혜보다 우선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실, 그것이 자신의 지혜의 핵심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다른 것은 소용없다는 단호한 태도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태도를 두고서는 여러 추측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17:16~34)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바울은 아테네에서 고린도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까닭에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말씀을 전파한 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다시는 철학적 사변을 펼치지 않겠다는 것으로 종종 추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억측입니다. 우선 아레오바고 설교가 실패했다고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규모 인원은 아니지만 열매를 거둔 그 일을 실패로 단정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또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바울의 실패를 전하기 위해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아가 바울 스스로도 아레오바고에서의 말씀 전파를 실패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스스로 결코 다른 지혜를 동원할 수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데 온 마음을 기울이는 태도로 임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진실이 무엇일까요? 그 의미는 오늘 본문말씀의 후반에서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진실을 전하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 다시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언변이 뛰어나지 못한 자신의 약점(고후 10:1; 10)을 연상시키는 말로 재삼 강조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로 갔을 때에, 나는 약하였고, 두려워하였고, 무척 떨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인정한 바와 같이 바울은 사람들을 마주 대하고 말할 때 언변이 뛰어난 인상 깊은 설교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글은 뛰어나지만 그의 말은 어눌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바울의 그런 약점을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단지 그 외적인 약점을 들어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전하는 진실이 갖는 힘, 이제껏 자신의 지혜로는 해명하기 어렵지만 정말 놀라운 진실이라는 것을 깨우친 사람의 근원적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자기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진실을 말해야 하는 사람의 경외감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재삼 말하기를 이른바 세상의 지혜로 그것을 설파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그것은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보여주는 증거,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힘에 이끌리는 것을 뜻합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은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 체험을 할 수도 있으며, 말(말이나 글)로써 어떤 진실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전하고자 하는 진실에 몰입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직접 말을 할 때나 서신을 쓸 때, 바로 그와 같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에 이끌려 자신을 전적으로 개방하는 태도로 임해왔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설교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될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현란하지만 알량한 언변과 수사에 의존하는 얄팍한 믿음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에 근거한 믿음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목사의 말 자체에 현혹되지 말고, 그 말이 전하고자 하는 신비로운 진실에 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달을 봐야지 손끝에 시선이 머물면 안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진정성을 갖고 있고 진실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다면, 다 아는 진실입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자신의 말만 믿으라는 설교자, 그리고 그 말에 현혹되는 청중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은 피차간에 그런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6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힘주어 말하고자 진실이 무엇인지 운을 떼기 시작합니다. 이미 앞에서(1절) 바울은 세상의 지혜, 인간의 지혜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여 오직 한 가지 진실을 말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 세상의 지혜와 대비되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것으로 분파를 형성한 고린도교회를 향한 선포에서 바울은 지혜를 한편으로는 부정적 의미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가 부정적 지혜를 말한다면 하나님의 지혜는 긍정적 지혜를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와 대비되는 이 세상의 지혜의 실체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멸망할 자들인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세상의 통치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구체적인 통치자들을 말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여전히 세상의 권세를 쥐고 있는 지배자들을 말합니다. 더불어 그에 편승하여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사람들, 서로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거북스럽게 느껴지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불온하게 여겨지는 사람들, 인간은 이기적일 뿐이라 믿고 오로지 자신의 지위와 권력, 자신의 영화를 탐하고 그것을 지켜주는 체제를 수호하는 데 혼신을 다할 뿐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모릅니다. 고린도교회가 서로 지혜를 자랑하며 분파를 형성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이 대목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랑하며 내세우는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다른 것이며, 그러한 태도는 성숙한 사람의 태도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오직 사랑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 이사야서 64:4을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딱 떨어지게 그 본문을 인용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고, 외경 엘리야의 묵시의 한 구절과 유사한 인용구로 바울은 그 지혜의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체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일을 압니다. 자기중심적 세계에 매몰되게 만드는 세상의 지혜와 다른 하나님의 지혜는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초월하는 삶 가운데서 도달하는 지혜입니다. 바울이 13장에서 사랑을 역설하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세상의 지혜와는 다른 그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바울은 앞에서(1:18)에서 그것은 유대인이 추구하는 기적과도 다르고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와도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많은 것을 얻을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소진시킬 뿐인 세상의 길이 아니라,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삶의 기쁨을 주고 구원을 맛보게 해주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누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매우 강렬한 언어로 역설의 진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완전해진다는 것, 부요한 자들이 가난해지리라는 것, 결혼한 사람들은 아내가 없는 자들처럼 하라는 것,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졌다는 것, 세상에서 쓸모없는 자들 같으나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 죽었으나 살아 있다는 것 등등 수없이 많은 역설의 진실을 강조합니다. 정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삶을 누리기 위해서, 진정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이 지향하는 것이 정말로 진정한 삶을 보장하는 것인지 돌아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진정한 삶과는 상관없는 것들에 거꾸로 매여 삶을 저당 잡히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수 있는, 근본적 지혜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온갖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한 교회에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환기시켜주는 말씀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신학자 한 분이 이야기했습니다.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한 10년간 교회 밖을 향한 전도를 중단해라.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전도해라. 목사님 제발 예수 믿으세요. 신부님 제발 예수 믿으세요.’ 이렇게 전도한 후 비로소 세상을 향해 전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올해는 우리 기독교장로회의 정신적 뿌리가 되는 몇 분이 동시에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북간도 명동촌 출신의 선각자 문익환, 윤동주, 장준하, 그리고 민중신학의 정초자 가운데 한 분인 서남동이 그분들입니다. 기회가 될 때 한 분 한 분 그 삶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만, 그 가운데 한 분 문익환 목사님은 어제가 마침 24주기 기일이기도 했고 때맞춰 지난 주간 그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히브리민중사>가 지난 주간 28년만에 복간되었기에 기에 잠시 생각해봅니다. 복간에 즈음해 그 의의를 밝히는 글을 제가 덧붙였는데, 한국현대사의 거인 문 목사님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심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책의 의미를 “민중의 발바닥 언어로 풀어낸 성서 이야기”(원래는 “민중의 발바닥 언어로서 성서 이야기”)라 했고, 시인, 성서번역가, 신학자, 목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실천가 등 다양한 이름을 그 분의 삶을, 평전의 저자(김형수)의 통찰에 의존하여 “목사로서 언어의 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를 비워버리고 온 몸으로, 아니 발바닥으로 삶을 기록해낸 선각자”라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말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분이었지만 현란한 말에 의탁하지 않고 삶으로, 발바닥으로 진실을 실천하고 체현한 분이었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말씀의 진정성을 삶으로 드러낸 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다시금 새기고, 진정한 구원의 길에 동참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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