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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진정한 삶을 보장하는 길 - 예레미야 9:22~24 [음성]
 최형묵    | 분류 :   | 2018·01·28 14:41 | HIT : 70 |
2018년 1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인간의 진정한 삶을 보장하는 길
본문: 예레미야 9:22~24



오늘 우리는 모처럼 예레미야서의 한 본문을 함께 읽었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의 의미를 나누기 이전에 먼저 한 가지 환기하고 싶습니다.

성서의 정신세계, 성서의 신앙세계를 형성하는 데 가장 독특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예언자들입니다. 이미 성서의 세계에 대해 익숙한 사람들에게 예언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로서 새삼스럽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일반적인 고대의 정치ㆍ종교의 양상을 생각하면 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는 이례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흔히 고대국가가 형성될 즈음 이전의 제정일치 시대의 지도자는 두 가지 지도자로 그 역할이 분화되는 양상을 띱니다. 곧 왕과 사제로 나뉩니다. 그런데 성서의 세계에서는 그 두 직분과 함께 또 하나의 직분이 등장하는데, 바로 예언자입니다.
우리말로 예언자는 앞날을 내다보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성서의 예언자는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봐도 안 될 것 없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강하고, 사실은 본래 히브리어 ‘나비’는 일종의 접신상태에 빠진 사람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를 생각하면 온전히 하나님에 붙들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입니다.
종교적 지도라면 으레 감당하는 그 역할이 뭐 그렇게 특별한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그 예언자의 역할이 왕, 그리고 제사장의 역할과 뚜렷이 구분되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맡은 데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특별히 왕이나 제사장들이 세습된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은사로 그 역할을 맡게 된다는 점에서부터 구별됩니다. 이른바 카리스마적 지도자입니다. 인간적 세속적 성취의 계보와 무관하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로 등장하는 지도력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에게 공통된 소명기사를 보면 그 성격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들이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로 역할을 부여받은 것은, 왕과 제사장을 통해 구현된 정치적 종교적 현실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현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고대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서 보면 왕과 사제는 대개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됩니다. 신의 후광이 권력의 영광이 됩니다. 그런데 성서의 세계 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의 후광이 권력의 영광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신의 빛은 권력의 빛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드러내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권력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제약을 받고 견제 받습니다. 인간의 권력을 견제하는 구체적 역할을 감당하는 이들이 곧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그저 추상적인 하늘의 뜻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역사와 예언자 자신의 경험과 인격을 매개로 하는 매우 구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 그 백성들 가운데서 이뤄져야 할 공평과 정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권력을 제한한 것은 그 백성의 권리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언의 요체였습니다.
성서의 독특한 정신세계, 신앙세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출애굽이라는 해방의 사건으로부터 출발한 성서의 정신세계는 바로 예언자들의 선포를 통해 끊임없이 증폭되고 계승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이제 본문말씀의 주인공 예레미야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성서의 예언자들이 모두 비범하지만, 아마도 그 가운데서 가장 비범하고 독특한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레미야일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풍전등화의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로서 민족의 운명과 고난을 자신의 개인적 삶에 그대로 아로 새기고 체현한 예언자였습니다. 성군 요시야 왕의 개혁정치가 반짝였지만, 그 영광은 그야말로 잠깐 뿐 이후 유다 왕국은 파국으로 치닫고 제국 바빌론에 의해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지도자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갔고, 예언자 예레미야는 폐허가 된 고국 땅에 남고자 하였으나 유다 왕국 내의 반 바빌론파에 의해 이집트로 동행 망명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그 격랑의 역사 현장에서 예언을 선포하였을 때 그의 예언은 사실 그 누구에게도 수용되기 어려웠습니다. 특별히 바빌론의 침략이 본격화되었을 때, ‘바빌론에 저항하는 것은 소용없다, 바빌론의 심판을 받아들여라’라고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국가주의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 없고, 민족주의적 입장이나 애국주의의 입장에서도 수용되기 어려운 선포였습니다.
예레미야의 입장에서는 국가나 민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민중입니다. 민중들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 정의와 평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민족이나 국가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현대적 개념으로 말하자면, 국가가 있고 국민이 있느냐, 국민이 있고 국가가 있느냐 했을 때, 예레미야는 후자의 입장을 따른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모든 예언자들의 공통적인 입장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했을 때 그 구체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정의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독 예언자 예레미야에게서 이 문제가 도드라지게 드러난 것은 그야말로 국가냐 백성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예언자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정의를 역설한 것입니다. 그 정의가 무너진 국가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예언자 예레미야의 선포였습니다. 민족주의적이고 애국주의적인 선포였다면 더 많은 공감을 얻었겠지만, 예레미야는 확고하게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이뤄지는 정의를 선포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이뤄지는 정의를 역설하는 그 입장을 배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외로울 수밖에 없었고, 온갖 박해와 오해를 다 겪어야만 했고, 그런 만큼 그 누구보다도 극심한 고통을 몸과 마음으로 다 겪어야만 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의에 충실한 예언자의 운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그와 같은 입장을 전제하고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나 주의 말이다. 너는 이렇게 전하여라. 사람의 시체가 들판에 거름 더미처럼 널려 있다. 거두어 가지 않은 곡식단이 들에 그대로 널려 있듯이, 시체가 널려 있다(22).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23~24).”
일련의 이어지는 선포의 한 대목입니다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 전반부는 섬뜩한 현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앞 구절(21)을 보면 더욱 구체적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창문을 넘어서 들어왔고, 우리의 왕궁에까지 들어왔으며, 거리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사정없이 죽어 가고, 장터에서는 젊은이들이 죽어 간다.” 온통 죽음이 지배하는 현실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말씀 후반부(23~24)는 그 현실을 넘어설 길을 제시하는 가운데, 바로 그 현실을 빚어낸 원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학력과 권력과 재력, 이렇게 이해하면 실감날 겁니다. 그 인간적 성취가 자랑거리가 되고 그 성취와 업적에 따른 사회의 실상을 말합니다. 그 성취의 토대 위에 세워진 사회가 죽음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앞부분의 말씀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내가 얼마나 성취하였는가, 내가 얼마나 우월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긍휼과 공평과 공의” 또는 번역에 따라 “인애와 공평과 정직”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삶의 관계를 규정하는 가치들입니다.
어떤 업적의 규모에 따라 쌓아올려진 체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내적인 관계가 우선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겉껍데기 규모의 형체로 드러나는 삶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마주치며 형성되는 자애롭고 공평한 관계, 그것이 옳다는 것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종종 이야기합니다만,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비약을 이룬 이른바 정신사의 ‘차축시대’의 가장 위대한 통찰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서의 세계에서 그 위대한 통찰에 도달한 중심에 이사야와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또 어떻게 이어집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사도 바울과 초기 교회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노동자의 비유(마태 20:1~16), 그리고 바울이 강조한 믿음의 의미가 다 이와 통합니다. 삶이 소중하다,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을 이루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기쁨으로 충일한 현실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근본 뜻은 오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여전히 중요한 빛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정말 우리 사회를 살리는 공정성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가 새삼 제기되고 있습니다. 최근 불거진 계기로 예를 들자면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관련되어 있고, 또 하나는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단일팀 구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공정성의 기준을 공채시험이라는 유일한 기준으로 한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이의 해법은 일종의 사회적 합의를 요청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성사과정이 중요한 지혜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단일팀 구성을 하게 되면 남쪽의 일부 선수들이 배제되어야 하고, 단일팀의 엔트리 인원을 늘려주면 다른 나라 팀과의 관계에서 불공평을 야기해 공정성이 문제되는 상황이었습니다. IOC는 남쪽 선수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다른 나라 팀에 양해를 구해 엔트리를 늘려주되 경기당 참가인원을 동일하게 하는 해법으로 단일팀을 성사시켰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해법의 기술적 차원이 아니라 그 해법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평화’라는 인류의 숭고한 대의를 실현하고자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어떤 형식과 절차의 바탕이 되는 정신,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대의가 분명하면 그 다음 절차와 형식은 그 대의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모색하면 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선포는 그 진실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삶을 보장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예레미야는 분명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는 것이야말로 그 길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이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할 때 그 진실을 다시금 새길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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