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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고백 - 고린도후서 12:1~10[음성]
 최형묵    | 분류 :   | 2018·02·04 14:45 | HIT : 234 |
2018년 2월 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도 바울의 고백  
본문: 고린도후서 12:1~10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의 유명한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자신됨을 드러내주는 고백입니다.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진정한 사도가 될 수 있는 이유를 밝히는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미 바울이 위대한 사도로 알려져 있기에 사도로서 그의 역할을 의문의 여지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마다 내세울 꺼리가 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자처하고 또한 그 회중들 역시 자랑하는 마음으로 그런 지도자를 받아들였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둘러싸고 그런 지도자들이 많았고, 회중들 또한 그에 따라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여러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고, 또 어쩌면 다른 지도자들에 대해 그다지 높지 않은 평판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곳곳에서 자신의 사도됨을 스스로 힘주어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역시 그런 내용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이 경험한 신비한 체험을 말합니다. 그 신비한 체험을 한 주인공을 3인칭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늘에까지 올라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은, 고린도교회에 신비한 체험을 자랑함으로써 신앙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자신도 역시 그와 같은 체험을 하였고 그것을 자랑하고자 할 것 같으면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낯선 언어로 묘사되어 있지만, 그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데는 당대의 세계관 내지는 우주관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인들만의 우주관이 아니라 상당 부분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우주관인 것 같습니다. 이를 보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 우주관의 타당성 여부보다는, 일상적 체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신비체험의 특별한 성격일 것입니다. 평범한 경험의 세계와 그 세계 안의 언어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체험의 세계입니다. 그 체험, 그리고 그 체험에 따른 확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바울 자신도 결코 내세울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론적으로 그것을 자랑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흔히 생각하기에 그 자랑을 하면 그 청중에게 벌써 한 수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데도 그 자랑을 접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체험을 남의 이야기처럼 말한 것도 그 자랑거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를 꺼려한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서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어떤 진실보다도 그 어떤 후광에 사람들이 현혹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똑 같은 말이라도 평범한 촌부가 말하면 귀담아 듣지 않지만 사계의 권위자가 말하면 듣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진실을 전할 뿐 그 어떤 권위에 힘입어 그것을 전하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어떤 외적인 권위 때문이 아니라 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진실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자랑거리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사람들이 껌벅 죽을 수도 있는 신비한 체험마저도 자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대신에 바울은 자신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현혹하기보다는 남들도 다 알아볼 수 있고 헤아릴 수 있는 자신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되, 사람들이 보기에 자랑할 만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 우월한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남들 보기에 보잘것없는 자기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주께서는 내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나는 이것을 두고 이것이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하고 말씀하였습니다.” ‘내 몸에 가시’, 이것은 단순한 약점 정도가 아니라 뭔가 심각한 자기 몸의 상태를 말합니다. 바울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요, 가장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도대체 뭘까요?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합니다. 종교개혁가 칼빈은 아직도 여전히 사탄의 하수인에게 붙잡혀 있는 몸의 현실, 다시 말해 완전히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몸을 일컫는 것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 인간이 지닌 한계를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인 의미의 인간적 한계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표현은 ‘주께서... 주신 가시’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질병을 뜻합니다. 더욱 ‘몸에 가시’라는 말은 육체적 질병을 시사합니다.    
그 질병이 무엇일까 하는 점에서도 여전히 의견이 분분합니다. ‘간질병’이라 보기도 하고, ‘안질’이라 보기도 하고, 때로는 ‘언어장애’로 보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0절을 보면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그를 직접 대하면 별 볼 일 없고 말도 어눌하다”고 했는데, 그것을 확대 해석해 어눌한 말주변을 언어장애 탓으로 보려는 것입니다. 어떤 질병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심각한 육체적 질병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갈라디아서 4:13~14) 이런 정황으로 보아 바울은 심각한 질병을 앓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상태가 사람들에게 꺼림칙할 정도였지만, 사람들은 바울을 외면하거나 멸시하지 않고 진실하게 받아줬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그리고 갈라디아서의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바울을 정말 괴롭히고, 바울로 하여금 정말로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치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가장 결정적인 영예의 계기가 됩니다.
갈라디아에서 바울은 병든 것 때문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병으로 거동을 하지 못해 그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어, 그것이 결국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소극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병든 그를 보고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그곳 사람들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극진한 돌봄과 긴밀한 교감을 뜻합니다. 여기에 보면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이 눈이라도 빼어줄 태도’였다고 한 데서, 바울의 질병이 안질이 아니었을까 추정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깊게 헤아리고 교감을 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의 화려한 매력이나 유창한 언변에 끌린 것이 아니라 그의 가장 약함을 받아들이는 데서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진실을 투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더 바랄 것 없는 인간관계, 신뢰관계를 뜻하며, 그 가운데서 이뤄지는 진실에 대한 진정한 교감을 뜻합니다.
그런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바울의 상황을 생각하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전하는 오늘 본문말씀에서 느껴지는 것은 바울이 너무 말이 많다고 느껴지기는 합니다.^^ 이렇게 번잡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그 형편과 마음을 알아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그 논지가 함축하는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또박또박 말해야 했던 사도의 심정은 얼마나 번거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그 논지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해야 했던 심중까지 보입니다. 말하자면 사도로서 바울의 인간적 고뇌 같은 것이 이 대목에서 엿보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하는 심정이 얼마나 구차스러웠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결국 자신을 인정해달라는 것이 응당한 대우를 해달라는 것인데, 그걸 말해야 하는 사도의 입장이 얼마나 답답하고 구차스러웠을까요?
하기는 그렇게 또박또박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 그렇게 또박또박 말해놓은 덕분에 오늘 우리들도 그런 정황을 다시 헤아리고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 되었으니 다행인 점이 있기는 합니다.^^
다시 그 논지를 따라 가자면...  

오늘 본문말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약점을 인정할 때 진실해집니다. 타인을 대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의 약점을 용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것에 마음이 끌린 경우 그 화려한 빛이 퇴색해갈 때 마음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수많은 대중문화의 스타들이 명멸해가고, 때로는 그 스타들이 잊혀져간다고 느낄 때 그 상황을 감당하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그 화려함의 덧없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약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실망할 까닭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구원의 도로 아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 진실을 믿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부정당하고 모든 것이 비워진 십자가의 자리는 모든 것이 다시 긍정되고 모든 것이 다시 채워지는 출발점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어떤 믿음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누리고 있을 때 지키고 있는 믿음이라면 그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믿음 또한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다”는 역설은 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믿음 안에 있을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며, 교회는 그 믿음 안에 있을 때 진정한 교회가 됩니다. 세상에서 자랑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인이 자랑할 때, 세상에서 자랑하는 그 모든 것을 교회가 자랑할 때,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존재 의미는 사라집니다. 그런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아무리 많아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종교 장사와 종교 상품만 남을 뿐입니다.  
강함은 누군가를 배제하는 속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약함은 모두를 수용합니다. 약함은 겉모습과 명징한 언어를 넘어서 진정한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 안에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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