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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깨우치고 전하는 용기 - 이사야 50:4~9[음성]
 최형묵    | 분류 :   | 2018·03·25 13:56 | HIT : 120 |
2018년 3월 2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진실을 깨우치고 전하는 용기
본문: 이사야 50:4~9



오늘 본문말씀은, 두 번째 이사야(40~55장)가 말하는 야훼의 종의 노래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의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그 백성에게 희망과 위로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 두 번째 이사야의 주요 메시지입니다.
그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 가운데 담겨 있는 야훼의 종의 노래는, 고난의 종으로서 훗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당대의 시점에서는 때로는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 자신의 처지와 사명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고난의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과 희망을 지켜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와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야훼의 종에 관한 선포로서 가장 선명한(이해하기 쉬운)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 말씀은 당시 예언자의 처지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대의 시점에서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든, 또는 후대에 그 어떤 식으로 해석되어 왔든, 오늘날 우리의 시점에서 이 말씀은 바로 우리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서두에서 그 핵심을 다 말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학자’(limmud)라고 번역된 말은 문자 그대로 하면 ‘학교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은 때로는 ‘학자’ 또는 ‘스승’으로, 그리고 때로는 ‘제자’라고도 동시에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번역본에 따라 ‘학자’라고 하는가 하면(개역 / 표준새번역), ‘제자’(국제성서주석)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앞에는 ‘학자’로 뒤에는 ‘제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학자처럼 말하고, 제자처럼 듣는다’(학자의 혀 제자의 귀) 정도로 그 뜻이 새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위계화된 서열을 전제하는 일반의 통념에 너무 쉽사리 영합해, ‘학자는 일방적으로 말하고 제자는 수동적으로 듣는다’, 또는 나아가 ‘목사는 말하고 평신도는 듣는다’는 식의 해석의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든 동일한 개념으로 봐야 하고, 그 뜻은 스승이든 제자이든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 한자말에 ‘학인’(學人), 또는 벼슬한 사람과 구별되는 의미로 사용되는 ‘학생’(學生)이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어쨌든 끊임없이 배우고 깨우치려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제도화된 질서 안에서의 ‘선생’과 ‘제자’가 아니라, 쉼 없이 배우고 깨우치려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늘 배우고 깨우치려는 사람처럼 제대로 말하고 제대로 알아들어 먹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요즘 제도화된 교육구조 안에서 ‘영혼 없이’ 가르치는 ‘선생’, 그리고 역시 ‘영혼 없이’ 지식을 전수받는 ‘학생’의 이미지를 연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늘 겸허하게 배우려는 자세, 그리고 늘 깨우친 것을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전하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늘 본문말씀을 가장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말씀은 첫 번째로, 그 ‘학자’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말씀을 정확하게 따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성서를 들여다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히 예언자들의 경우에 공통되는 한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 한결같이 그 점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어디 특별한 소명을 받은 경우에만 해당하겠습니까? 공중 앞에서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특히 공중 예배시에 기도를 하라거나 말씀을 하라고 하면, 그 두려움은 거의 ‘공포’에 가까워집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나는 혀가 둔하고 말이 어눌한 사람’이라고 했고, 오늘 본문말씀을 선포한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했고, 예레미야도 ‘나이가 어려서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한결같이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했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들의 인간적 진솔함을 드러내줌과 동시에 만인 앞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진실을 거침없이 말한다는 것, 그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진실을 깨닫기 어려워 말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때로는 뻔히 깨달은 진실마저도 말하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한편에게 듣기 좋은 말은 한편에게는 듣기 거북한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언제나 중대한 선택, 결단을 동반합니다. 다른 한편 그 결단 없이 내뱉는 말은 소통의 수단이 되기보다는 상처의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그 선택, 그 결단을 가능하게 해 줬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분명한 선택을 합니다.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지친 사람’, 그 사람들은 바빌론에 포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바빌론에게 격려의 말, 아첨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피곤하고 지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의 말을 선포합니다. 40장 28~3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오늘 말씀은 이 말씀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진실을 말함으로써 피곤하고 지친 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선택을 잘 하도록 우리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고 했습니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두 번째 초점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 지친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귀를 열어놓고 날마다 새롭게 깨우치는 일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예언자의 직무, 하나님의 종의 직무, 그리고 오늘 신앙인들의 직무는 앵무새처럼 상투적인 말을 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문제로 깊이 골몰하고 누군가에게 상담을 청했는데, 빤히 그 답이 정해져 있어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의 답변만 들었다고 했을 때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물론 상담이라는 것은 말, 언어와 논리를 뛰어넘는 차원을 지니기 때문에 그냥 말만 해도 효과가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뻔한 말로도 충분히 위로를 받을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기도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절박하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상투적인 답변만으로는 그 답이 충족될 수 없습니다. 또 그처럼 절박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예컨대 제가 매주일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인 말씀만 선포하고 있다면, 여러분 얼마나 따분할까요? 또 거꾸로 제가 심혈을 기울여 성경 말씀을 함께 깨달으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교우들의 신앙생활과 의식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또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물론 이 경우에도 언어, 말씀으로 다 충족할 수 없는 예배의 또 다른 차원이 있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일 자체가 허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삶의 변화가 없는 신앙생활, 그런 것과 무관한 예배에의 동참은 일종의 주술적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스스로의 깨달음을 위해서, 그리고 그 깨달은 진실을 왜곡 없이 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의 귀를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늘 그대로가 아니라, 아침마다 깨우칠 수 있는 길, 그것은 늘 배우는 사람처럼 자기의 귀를 열어놓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하기를, 세상에서 제일 고약한 직업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학자요 하나는 성직자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학자들은 자기 이론과 다르면 다 틀렸다고 비판해버려서 문제고, 성직자는 자기의 신앙과 다르면 다 이단이라고 정죄해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학자에다 성직자까지 겸하게 되면 그 문제의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하겠지요. 진리를 탐구하고 깨우쳐 전해야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단 학자와 성직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무지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와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있는 오늘의 세태를 극적으로 꼬집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세계에만 갇혀 있는 사람이 어떤 말을 뱉어놓는지 오늘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접하면 혹 세상에 뭐 그렇게 새로운 게 있고, 뭐 그렇게 다른 것이 있어서 ‘아침마다’ 그것을 보고 깨닫기 위해 긴장해야 할 필요 있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일과 하나 하나라도 흐트러짐 없이 잘 감당하고, 그 동안 배우고 알고 있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말하고 잘 써먹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 아니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사람 사는 모양이 하루하루 그렇게 심각하게 변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만큼 새로운 지식과 깨달음이 많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대로 살아가도 사는 데 불편한 것 없고, 또 남에게 칭찬받으면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똑 같은 현상을 경험하면서 평소에는 무심하게 지나쳤는데 어느 날 문득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경험을 합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고 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늘 저모양이다, 저 가게는 항상 저 자리에 있다, 아침이면 으레 우리 집 창가에는 새가 지저귄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모든 현상이 달리 보이고 달리 느껴지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경험합니다.
그 계기가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의 변화, 달리 말해 우리들의 감수성이 평상시와는 달리 반짝일 때 일어납니다. 옛 고향을 모처럼 방문했는데, 옛날에는 그렇게 멀기만 하던 길이 그렇게 가까울 수 없고, 그렇게 높던 담장이 모두 내 어깨 아래로 보이고, 그렇게 넓던 길이 좁게 느껴지는 현상, 그것은 나의 변화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을 두고, 예전에 느끼고 생각했던 그대로 예전에 이랬는데, 이건 분명히 변조되었다, 이렇게 우길 사람은 없습니다. 변화된 나의 몸, 변화된 나의 시각에서 받아들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깨우친다는 이치도 바로 그와 같습니다. 세상과 나의 생활이 어제나 오늘이나 그렇게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의 변화는 엄청난 깨달음을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열린 귀로 들으려는 예민한 감수성으로 모든 일을 대할 때,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매주일 우리가 같은 형식의 예배를 반복하면서 말씀의 의미를 새기는 것도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느 순간에나 진실을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지친 사람에게 진실한 말로 격려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신앙을 갖는 것, 그것은 항상 나를 열린 세계를 향하여 내맡기고, 이제껏 내가 들어보지 못했거나 들었어도 지나쳤던 것에 새삼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을 받아들이려는 귀가 열려 있으면, 진실을 말하려는 일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잘 들으면, 잘 말할 수 있습니다. 잘 들어야 잘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본문말씀의 후반부가 증언하고 있듯이, 비방받기도 하며, 직접적으로 수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진실한 소리를 듣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반기지 않은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진실인데, 고대 세계에서 지금 이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놀라운 통찰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라도, 하나님의 종이라도 곡해받고 핍박받을 수 있다는 진실, 오히려 그것이 더 일반화된 현실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 삶의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 통찰은 마침내 고난받는 종으로서 메시야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그 통찰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전하는 사실 때문에 비방 받고 수모를 겪는다는 사실, 그 때문에 진실이 가리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 진실의 길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나는 등을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와 같은 믿음, 확신이 절실합니다. 신앙을 갖고 있는 저 사람을 만나면 진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에 가면 진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 기대와 믿음을 우리는 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병들고 지쳐 있을 때, 진실한 목소리로 위로하고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거꾸로 교회가 세상의 질책을 받아야 하고, 교인이 세상의 핀잔을 받아야 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진실을 깨우치기 위해 귀를 열고,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우리 삶과 믿음을 돌이켜보기 바랍니다. 이제 시작되는 고난주간, 진실한 삶을 살았고, 진실을 전파한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고난을 겪었지만, 마침내 십자가위의 죽음에 이르렀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세상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깊이 새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로부터 얻은 깨달음으로 스스로 기쁨을 누리고 세상에 위로를 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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